▲ 조수연 변호사 |
대표적으로 박찬종·문국현 전 의원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먼저 박찬종 씨의 경우를 보자. 지난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당선되어 활동하다가 5공화국 때부터 신민당으로 소속을 바꾸었다. 1987년에 김영삼·김대중 등 양김이 분열을 하자 독립을 선언하고 1991년에 '신정치개혁당'이란 것을 만들어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4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깨끗한 정치인'이란 것을 트레이드 마크로 내세우면서 '무균질 우유' 광고에도 등장했지만, 그 후에는 여의치않은 여러 사정으로 통일국민당·신한국당 등과의 합당과 결별을 반복하다가 역사 속의 정치인이 되었다.
기업인 출신으로 혜성처럼 나타난 문국현 씨의 경우는 더욱더 짧게 정치인생을 마감했다. 그 역시 독자적으로 새 정치를 한다며 창조한국당을 만들어 2007년 대선에 출마해 5.8%라는 적지 않은 득표율을 올렸다. 그 여세를 모아서 2008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여당 실세인 이재오 의원을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선거자금을 잘못 모은 죄로 집행유예 판결을 받고 의원직을 상실하자 그와 그가 만든 정당은 한순간에 정계에서 사라졌다. 이들은 한때 유력한 정치인으로 모두 '새 정치'를 강하게 주창하며 깃발을 들었지만, 본인의 한계와 기존 정치계의 두터운 장막을 뚫지 못하고 좌절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최근에 등장한 안철수 의원이 위 선배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가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안철수 의원은 2010년께부터 청춘콘서트로 빈번하게 언론에 노출되더니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불과 20분간의 담판 끝에 박원순 후보에게 서울시장 후보를 양보해 당선시켰다. 다시 야권의 대통령 후보직을 문재인 후보에게 양보했다. 대선 후에는 기존 정당과 정치인을 싸잡아 비난하며 역시 '새 정치'를 주창했다. 국민은 박찬종·문국현 의원과 같이 참으로 신선하게 바라보았다.
'새정치 연합'이란 신당을 창당해 올해 6월에 있을 지방선거부터 후보를 내겠다고 공언을 하면서 세몰이를 했다. 신당의 깃발을 들고 출마하겠다는 정치후보자들이 자연스럽게 몰려들었다. 그런데 여기까지였나 보다. 마음에 드는 참여자가 적었던지 지난달 24일에 기초의원과 기초단체장에 대한 무공천 방침을 갑자기 발표해 신당으로 출마하고자 했던 정치지망생들을 일거에 황당하게 만들었다. 그런 상태에서도 지난달 27일에는 대전시당 창당발기인대회에 참석해서 새 정치를 향한 개혁추진에 대전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를 촉구하고 한명 한명과 사진까지 찍으며 격려를 했다. 이에 적지 않은 대전시민이 관심을 두고 호응을 했다. 그런데 다시 불과 3일 후에 안철수는 독자적인 창당작업을 포기하고 민주당과 공동으로 신당을 창당하는 것으로 정리하고 모든 것을 사실상 원점으로 돌렸다. 이런 의사결정은 사실상 안철수 의원이 혼자 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당직자들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홀로 정당의 전형적인 의사결정구조다. 이런 중대한 결정에 반발하는 당직자들이나 당원을 찾아보기도 어렵다. 어차피 안철수만 바라보고 모여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속으로 불만이 없을 리 없다.
안철수의 이런 결정을 그를 믿고 따랐던 사람들을 고려한 신의 있는 결정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다. 이대로 가다가는 올 지방선거는 물론이고 그 후의 총선에서도 크게 기대할 것이 없다는 비관적인 생각이 그를 포기시킨 것으로 보인다.
말로만 새 정치였지 도전정신을 찾아보기도 어렵다. 그는 현실이 어렵다고 혼자 사라졌지만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뒤에서 먼지를 옴팡 뒤집어쓰고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것을 보았는지 못 보았는지 의문이다.
이것이 '홀로 정치'의 한계다. 스타 한 명만 바라보는 정당의 본모습이다. 새 정치를 한다는 사람의 무책임한 모습을 연달아 보는 마음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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