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체험을 민영방송의 고정코너에서 소개했더니 아나운서가 대뜸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기억하겠느냐고 물었다. 3초 머뭇거리면 방송사고인 생방송이었다. “머릿결이 (윤)기 나는 여자, 상반신에서 (지)성미가 풍기네, 하체가 (영)해, 젊고 풋풋해….” 얼버무림으로 위기는 모면했다. 삼분위법을 사실대로 발설하면 방송심의에 걸린다.
좋은 약은 몸에 쓰다는 정설에 반기를 들려다가 잠시 곁길로 빠졌다. 단 약도 몸에 좋다. 요구르트나 사과주스를 먹고 약을 먹어도 약효엔 지장이 없다. 어쩌면 우리가 꿈꾸는 '로망'도 쓴 마이신에 입힌 당의정 같다는 생각이다. 로망(roman)이 속어인 로망어로 쓰인 연애담이라거나 일본인들이 '로만' 발음이 나는 '浪漫'(낭만)으로 썼다는 등의 고지식함은 조금 내려놓자. 로망이 밥 먹여주기도 한다.
실제로 가상세계인 세컨드 라이프를 팔아 리얼 라이프가 못마땅한 이들의 돈을 긁어모은다. 상품 아닌 로망을 파는 회사가 뜬다. 여자의 방보다 은밀하다는 가방(백)이건 연초록 수풀에서 너울거리는 나비의 호접몽이건 관계치 않는다. 로망은 빗나감이 아닌 비껴감이다. 클래식의 음 이탈은 실수지만 재즈의 '삑사리'는 새로운 사운드의 로망이 된다. 대강 그런 이치다.
로망, 즉 꿈꾸는 이야기를 갈망하고 직조할 대상은 널려 있다. 개인적으로는 멀리 떠난 이웃이 거저 준 분재 수십 그루도 그것이다. 축소 지향의 20~50년생 나무들에서 진기한 개량화가 피고 지지만 그래본들 창밖 정원 풍경보다 아름답지 않다. 정원은 또 저 멀리 보문산 진경의 한 귀퉁이도 능가하지 못한다. 조경의 영원한 로망은 자연임을 깨닫는다.
“어떤 그림이 좋은 그림이죠?” 누가 그림을 걸고 싶다기에 “자신이 봐서 좋으면 그게 명화죠” 하고 대답해줬다. 당신의 로망을 따르라는 단순한 말과도 같다. 로망은 생동감이다. 언어조차 '싱싱하다'는 '新新(신신)하다'가 뿌리임을 믿는다. '細細(세세)하다'가 '시시하다', '슬슬(瑟瑟)하다'가 '쓸쓸하다', '薄薄(박박)하다'가 '빡빡하다'로 됐다면 '生生(생생)하다'가 '생생하다'로 전이됐다고 탈날 게 없다. '생생'은 음양이 서로 어울리고 낳음이다.
옥천 출신 함순례 시인의 시가 대전 낭독회에서 화제를 모은 일이 있다. '꼴림은 떨림이고 싹이 튼다는 것'에서 시선을 잡아끌었다. '로망'도 꼴림, 끌림이다. 요즘 정부가 문화융성을 선창하고 자치단체는 문화활동, 문화복지를 부쩍 강조한다. 정책으로서 문화가 국민 마음에 로망을 못 심어주면 또다시 슬로건에만 머물 것이다.
이제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양약(良藥)은 고구(苦口)이나 이어병(利於病)'의 고정관념을 버려야 하는지 모른다. '겉보기 좋지만 실제로는 해로움'에 빗대는 '당의정'의 사전 풀이도 싹 바꾸고 싶다. 쓴 약이 혀를 자극하면 콜레시토키닌이 약 흡수를 방해할 수도 있다. 동경, 선망, 꿈 등 당의정 입은 병정 같은 로망이 우리 자유 에너지를 확장시킨다면 발밑에서 꿈틀거리는 봄이 어찌 달금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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