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헌오 대전문학관장 |
용서하고 싶은 사람이 용서할 가치조차 인정받지 못하거나, 용서하지 않아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만큼 지질하면 슬프고 한스런 일이다. 용서받을 사람이 화려한 강자의 위치에 있어서 더 많은 사람들을 억울하게 하면서도 의식조차 않는다면 세상은 어두워진다. 그리고 세상이 어두워질수록 부도덕한 강자는 잘못을 은폐시키거나 합리화 할 수도 있다.
과연 용서란 무엇인가? 이같은 현실을 인정한다면 용서는 자위적 행위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정당한 용서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지성의 본질이며 미래의 소망이다. 그래야 사회적 가치가 바로서고, 사회적 합의를 이룰 수 있으며, 순결한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 진심으로 용서를 청할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그것이 바로 아름다운 용서이고 힘의 원천일 것이다. 가해자가 피해가고 변명을 합리화하거나 힘으로 억압하면서 용서를 청하지 않는 사회에 산다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힘이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힘은 권력이고 다음이 재력일 것이다. 이같은 힘이 잘 작용할 때는 약이 되고, 잘못 작용할 때는 독이 된다. 요즘 밤마다 소치에서 전해주는 동계 올림픽 소식에 귀를 기울이는데 이름도 친근한 우리나라 청년 선수가 러시아 마크를 달고 빙판을 훨훨 나는 모습을 보면서 그를 응원하는 국민감정에 어안이 벙벙했다.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그 선수가 태극마크를 달지 못하고 러시아 깃발을 들게 한 것은 잘못된 권력작용 때문이라고 믿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지방자치제가 되면서 생활현장까지 파고드는 선거문화가 만들어내는 권력작용에도 많은 병리가 발생한다. 민주주의의 축제가 되어 민주적 일꾼을 뽑고 나면 전체 시민이 함께 권한을 맡겨야 할 선거가 자칫 싸움을 방불케 하는 결전으로 치닫기도 하고,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되는 사람들을 적대시하며, 비겁한 아부꾼이나 간교한 기회주의자, 묵시의 방관자가 둘러싸고 있으면 권력은 남용되고 오용될 수 있다.
인터넷 댓글이란 힘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 풀지 못할 한의 늪으로 빠져든 사람들의 가해자는 누구에게 용서를 청할 수 있을까? 단골손님들의 악성 댓글 일삼기, 괴롭히는 재미 즐기기, 무책임하게 조작하기로 인하여 상상할 수 없는 피해자를 만들기도 한다. 우리 주위에 평생 독을 품고 사는 사람, 지나치게 욕심 많은 사람, 철면피한 사람, 교활한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자기이익을 챙기는 이들은 오히려 피해준 공간에서 전리품을 차지하면서 지장없이 살아가기도 한다.
방향을 바꿔보자. 내가 경험한 시대의 두줄기 혁명이 있었다. 첫째는 새마을 운동이었다. 70년대 공무원들은 월급받아 쌀밥을 먹고 살기조차 어려웠지만 하루 15시간 이상을 근무하면서도 신바람나게 일했다. 온 국민이 뜻을 합하고 땀을 합한 최초의 사회혁신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절체절명의 과제였던 빈곤타파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스스로 나태와 좌절과 불합리로 인한 빈곤을 용서하지 않는 자각이었기 때문이다.
또 한번의 경험은 바로 2002년 월드컵 때, 레드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정열적인 색채의 유니폼을 온 국민이 입고 한 덩어리 함성으로 '대한민국'을 외쳤던 일이다. 강력한 의지와 뜨거운 열정으로 고정관념에 갇혔던 빨간 색을 되살려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다.
세 번째 과제는 바로 완전한 지방자치 실현일 것인데 여전히 미완성의 상태에서 자맥질하고 있다. 주민이 믿고 선출한 사람들이 지방자치 발전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거나 완전한 지방자치를 실현할 수 있을만큼의 정당한 힘이 발휘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네 번째 혁명은 국민복지 실현일 것인데 아직은 질서화되지 못한 상태이며, 다섯 번째 과제로 여겨지는 창조경제 시대는 시작단계다.
모든 힘의 원천은 자신을 다스리는데서 시작된다. 자신의 잘못됨을 스스로 용서하지 않고, 자신이 가해한 약한자에게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며, 자기 잘못을 뉘우치는 자를 너그럽게 용서할 수 있는 문화가 자리잡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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