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태욱 복음신학대학원대 대안교육학과 교수 |
교육을 전공하는, 게다가 대안교육이라는 연구주제를 화두로 삼고 사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필자를 만나는 사람들마다 '교육이 문제다' 한다. 그 다음은 질문이다.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묻기는 하지만 딱히 답을 듣고 싶어 하는 눈치는 아닌지라 '어렵죠…'하며 슬쩍 웃으면 나름의 해법으로 열변을 토한다. 우리나라에선 모두가 교육전문가라더니, 정말 그렇다. 내놓는 해법의 폭도 전통적인 것에서 진보적인 것까지, 그리고 인지적인 면에서부터 정서적인 면까지 무척이나 다양하다.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하면 우리 교육의 문제가, 그리고 자녀 교육의 문제가 한숨에 해결될 수 있다고 굳건하게 믿는다는 사실이다. 대입제도를 이렇게 고치면 된다거나, 어떤 학원에 아이를 보내면 교육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식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기 어렵다. 우리 교육의 문제는 체계적인 시스템 속에서 발견되는 오류를 찾아내어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거나 개선하면 되면 순조롭게 흐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매우 복합적인 문제들이 실타래처럼 엉켜있는 복잡한 문제인 동시에 그것이 유기체 생물처럼 계속해서 꿈틀대고 변화한다. 그렇다면 어려운 문제다 하고 손을 놓아야 하는 걸까? 자녀교육은 또 어떤가? 매일매일 부딪히는 문제에 넋을 놓고 지낼 수는 없다. 어찌해야 하나?
교육에 왕도는 없겠지만 시대와 사회를 넘어서는 중요한 원칙은 몇 가지 있으리라. 교사교육이나 부모교육을 할 때 그 중 꼽는 중요한 두 가지는 '줄탁동기(啐啄同機)'와 '교학상장(敎學相長)'이다. '떠들 줄, 쫄 탁, 같을 동, 기회 기'는 불교 선종의 공안집 벽암록에 나오는 말이다. 알 속의 병아리가 스스로 밖으로 나아갈 때를 알고 알 안쪽을 쪼기 시작하면 그 소리를 들은 어미가 바깥쪽을 쪼아 알을 깨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즉 배움에 있어 배우는 이 스스로의 동기와 힘이 우선된다는 의미다. 거기에 부모든 교사든 가르치는 사람의 힘이 더해지면 비로소 알을 깨고 나오는 깨우침이 생긴다. 계란을 스스로 깨고 나오면 병아리가 되고, 남이 깨주면 달걀 프라이가 된다는 우스개와도 상통하는 이야기다. 교육이란 무언가를 꾸역꾸역 넣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죽비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교육이란 다른 한편으로는 끊임없는 기다림이라는 것을 되새기게 한다. 사랑과 관심으로 귀 기울이지 않고 일방적으로 밖에서만 쪼면 결국 알을 깨뜨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될 것이다.
교학상장은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함께 자란다는 것이다. 교육이란 결코 일방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뜻이다. '줄탁동시'가 안과 밖이 '함께' 쪼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처럼 교육의 결과인 성장 역시 한쪽만의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배우고 깨쳐서 스스로 성장하려하지 않는다면 좋은 교사가 되기 어렵다. 부모도 마찬가지. 스스로 배우고 성장하려는 태도 없이 자녀에게 '교육'이라는 명분으로 자신도 하기 싫은 일들을 부과하고는 그것을 참아내는 것만이 의미 있는 교육인양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자녀는 부모의 어깨를 보며 자란다'고 했을 때, 굳이 얼굴이 아니라 어깨인 데에는 분명 의미가 있다. 앞서 나아가면서 본받을만한 뒷모습을 보여주는 '먼저 난 사람(先生)'으로서 존재가 교사이고 부모다.
그러므로 교육을 바라보면서 필요한 것은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것, 자신의 행동을 되짚어 성찰하는 것, 그리고 그대로 행동함으로서 아이들의 귀감이 되는 것이다. 학교든, 학원이든, 누구에게든 교육을 위탁하려고 하지 말고 스스로 살펴 행하는 것. 이것이 더디 가더라도 우리 교육을, 우리 아이들을 바로 세우는 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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