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선곡선]'종합선물세트'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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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곡선]'종합선물세트' 설

김은주·편집부 차장

  • 승인 2014-01-27 14:22
  • 신문게재 2014-01-28 17면
  • 김은주 자료조사부 차장김은주 자료조사부 차장
어릴적 서울은 내게 기다림의 다른 이름이었다. 아니 서울사람이 그랬다. 할아버지 형제가 다섯, 아버지 형제가 넷. 그들 대부분이 서울에서 살았다. 지금처럼 교통이 좋지 않던 시절이니 설은 모두 모일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다. 일 년에 한 번씩 보던 얼굴은 그 자식들에 자식들이 합해지면서 점점 더 수가 늘어갔다. 다 모이면 엄마는 쉴 새도 없이 부엌에서 밥만 해 나르기에 정신이 없었고, 좁아터진 집은 조그마한 이 한 몸 쉴 곳도 없어 구석으로 밀쳐지곤 했다. 자칫 때 못 맞추면 내 밥마저도 선점하지 못해 배를 곯아야 했다. 그래서 명절은 곤욕스런 날이기도 했다. 나만 바라봐주던 할머니도 엄마의 관심도 그 때만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설이 되면 할머니 옆에 앉아 '언제들 오려나~'를 곱씹으며 오매불망 대문을 응시하곤 했다.

예쁜 옷 한아름 가져오는 손, 고기 한 뭉텅이 가져오는 손, 과일 한 상자 가져오는 손….

할머니께서는 오랜만에 오는 자식들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계셨겠지만, 난 그 양손에 들린 선물을 눈 빠지게 기다렸다. 그중 가장 애타게 기다린 것이 과자 종합선물세트였다. 과자상자가 다른 꾸러미들과 함께 다락방으로 옮겨지면 다락방 문 앞에서 떠날 줄 모르고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친척 오빠, 언니들과 함께 할머니 눈을 피해 슬금슬금 올라가 상자를 뜯는 순간 그 안에서 쏟아지는 사탕, 과자, 초콜릿에 눈이 휘둥그레지곤 했다. 다른 건 다 먹어도 절대로 손 댈 수 없었던 것이 있었으니. 할머니가 좋아하시던 영양갱이었다. 참다 못해 과감하게 뜯어서 먹던 영양갱의 맛은 지금은 추억이 됐다.

맛있는 과자에 좋은 옷을 사가지고 오는 서울사람들은 부자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머리가 크면서 다들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던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사업도 망하고 돈벌이도 쉽지 않고…. 모두들 자식 키우며 먹고 사는 일이 녹록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밤새 술상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다음날 아침, 좀 더 편해진 모습으로 한 해를 맞이하던 어른들의 모습은, 다락방에서 과자상자를 열어서 맛있게 먹으면서 한없이 즐거웠던 나처럼 그들 나름의 선물상자가 아니었을까.

내 상사의 험담을 조건없이 같이 욕해 줄 수 있는 사람, 궁핍한 내 삶을 얼굴 찡그리며 함께 고민해 줄 사람, 거침없는 성공에 힘찬 찬사를 보내 줄 사람. 오직 내 편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찾았던 고향. 그 부모 형제가 타향에서 살아가는 힘이었음에 틀림없다.

설이 3일 앞으로 다가왔다. 마음의 안식을 찾으려고 고향을 찾으려는 이들의 앞길이 시원하게 뚫리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님은 먼 길 굽이굽이 달려올 아들, 딸을 지치지 않고 기다려줄 것이다. 올 설엔 삶의 짐을 잠시 내려놓고 우리를 위한 종합선물 세트를 함께 풀어보자.

김은주·편집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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