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국학박사 |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 직속의 조선사 편수회에 의해 왜곡 기술된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고 역사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한국선도 사서의 내용과 최근 홍산문화 발굴 성과를 반영해 고조선 이전의 잃어버린 상고사를 새로 정립하고, 고구려와 발해사에 대한 중국과 일본과 러시아와의 학술교류를 자주 하는가 하면, 외교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우리 역사 왜곡하면 금서룡과 두계 이병도가 금방 떠오를 정도로 그들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사 편수회를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왜곡하는 데에 앞장섰던 사람들이다.
백당 문정창이 지은 군국 일본 조선강점 36년사 기록에 의하면, 일제는 1910년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직후인 1911년 말까지 약 1년 간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 주도로 불온서적을 수색한다며 군경을 동원해 전국 각지에서 51종 20만권의 사서를 강탈하거나 소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1930~1940년대에 일본 궁내성의 왕실 도서관에서 12년 동안 사무 촉탁으로 근무한 바 있는 재야 사학자였던 남당 박창화의 폭로에 의하면, 일제는 1916년부터 3년 동안 조선사를 편찬한다는 명목으로 또 한 차례 사적을 거둬들여 그 가운데 희귀한 비장사서들을 일본으로 가져가 은밀한 장소에 깊이 숨겨놓았다. 그런데 일제는 한민족의 혼을 말살하기 위해 단군 관련 기록을 중점적으로 약탈해 갔다고 한다.
금서룡과 이병도가 일제강점기에 우리 한민족에게 저지른 가장 큰 악행은 아마 환국-신시배달국-단군조선으로 이어지는 고조선 이전의 상고사를 송두리째 뿌리 뽑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요동 치해 있던 한사군을 한반도 북부로 비정하고, 고구려와 발해를 한국사에서 분리하여 금나라와 청나라로 이어지는 별도의 만주사로 보는 사관을 지녔으며,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설에 근거, 고대 한반도 남부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근대 조선 병탄에 이용하고자 했다.
이마니시 류는 16년 2개월 동안 조선사 편찬 업무에 관여해 오면서 단군고(檀君考)라는 단군 설화설을 만들어 우리 역사 왜곡에 앞장섰다. 그는 1512년 경주 부윤 이계복이 중간한 삼국유사 정덕본을 발굴해 영인하며 단군고기(檀君古記)에 나오는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개찬하여 경도제대 영인본 이름을 붙여 각계에 배포했다. 그의 이 같은 개찬작업은 그의 박사학위논문인 단군신화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악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계에 널리 유포시킴으로써 지금까지도 일부 삼국유사 해설 서적들이 그대로 왜곡 기술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오늘날 한국 사학계에는 직·간접으로 이병도의 제자 아닌 사람이 드물다. 그를 따르는 일련의 학자들을 두계학파라고 칭하는데, 그들은 실증주의 사관을 도입해 일제의 역사 왜곡을 철저하게 따라가고 있고, 하나의 카르텔을 형성해 한국 사학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행히도 일제강점기에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항일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대종교를 신봉하던 김교헌, 신채호, 박은식, 정인보, 안재홍, 유근, 이상룡, 장도빈 등이 일제의 식민통치와 식민사학에 대항해 목숨을 담보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고 민족사학을 정립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여 단군 이후 면면히 이어져 온 민족혼이 지금까지도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러므로 아직까지도 일제의 식민지 사관과 반도사관의 포로가 되어 우리 역사를 왜곡함으로써 애국 시민들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일부의 강단사학자들도 이제는 대오각성해 일제의 식민지 사학을 하루 빨리 청산하고, 신교문화사관·대륙사관·민족주의사관·국혼사관·복본사관(複本史觀)에 의해 우리 역사를 바로 세움으로써 지금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한국, 중국, 일본 간의 치열한 역사전쟁에 효과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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