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헌오 대전문학관장 |
1954년에 발간된 파적은 134페이지로 44편의 시를 담고 있는데 6·25 전란 바로 다음해 폐허가 된 도시에서 극도의 고난과 슬픔과 절망을 겪은 시인의 생생한 진술이 엿보이는 책이다. 60년을 살아온 귀중한 책자의 책장을 넘기면서 자못 흥분이 일었다. 대전문학사의 중요한 저서, 꼭 있어야 할 책 한 권을 대전문학관에 마저 채우게 되니 허전함이 일시에 사라졌다.
나무는 안으로 나이테를 감추기 때문에 무늬가 표면에 보이지 않지만 나이테는 나무를 지탱하게 해주는 뼈와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제를 비운 오늘이 있을 수 없고, 역사를 버린 현대가 있을 수 없다. 대전문학관은 대전의 문학사와 문인, 그리고 작품들을 기반으로 세워졌다. 하지만 그 소중한 보화는 망각되거나 유실되고, 매몰될 수 있다. 사라지는 것들을 되살리는 일은 소중한 생명의 진화를 의미한다.
대전문학관의 탄생으로 이미 고인이 되신 훌륭한 문인들의 행적과 작품들이 망각의 장막을 걷고 나와 시민들의 마음속으로 돌아와 이야기하고, 감동을 일으켜주며, 문학적 미래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제 수많은 문학자료들이 망실되기 전에 문학관에 모여 소독과 보존처리를 통해 건강을 되찾고, 영원한 가족으로 살게 됐다. 뿐만 아니라 현재 활동하고 계신 원로 문인들의 문학활동을 생생하게 담은 영상물을 제작하고 정리해 놓음으로써 후세까지 영원히 함께할 생명을 얻었다. 그런데 다시 기억되고, 읽으면서 존경하는 마음, 본받고 싶은 마음이 솟아나는 경우도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비판하고 저주하는 마음도 없지 않을 것이다.
현세를 살아가는 동안 누군가가 남긴 흔적이나 유산에 대한 가치와 의미는 후대가 평가하는 것이다. 생전에는 큰소릴 낼 수 있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변명도 있겠지만 그가 멀리 떠나면 아무 변명도 없다.
그것은 비단 문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역사의 물결이다. 소중한 것들을 되살리고, 불필요한 것들을 버려야 역사의 물결은 맑고 푸르게 흐른다. 세상에 흙탕물로 뒤범벅이 되어 흐르는 물줄기가 얼마나 많은가. 소중한 기억, 귀중한 유산, 본받아야 할 일들을 망각의 늪에 매몰시키고, 잘못된 관행을 되풀이하거나, 이권과 압권에 못이겨 바꾸지 못하는 풍조, 오욕된 역사의 유산 때문에 일어나는 갈등과 퇴행, 역사관이나 역사의식조차 날로 어두워져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해맑은 아침을 맞이할 수 없을 것이다.
건져내고 심어야 할 역사와, 태워서 묻어야 할 역사를 가리고 실행하는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역사교육을 소홀히 하면서 남의 역사교육이 잘못되었다고 떳떳이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신라의 향가로부터 그 시풍이 이어지고, 고려말 우탁의 탄로가(歎歌)로부터 우리 민족의 시조로 이어져온 시조를 교과서에서 삭제시켜가면서 일본의 하이쿠가 미국 초등교과서에 실리는 것을 시샘할 수 있는가?
우리 대전의 문학사에 있어서도 참으로 소중한 유산들이 무수히 있다. 세계적인 문학유산이 될 수 있는 대전의 삼대 테마를 찾아보라 한다면 나는 취금헌 박팽년의 가족사와, 서포 김만중의 효 사상과 한글소설, 현대 전국의 시인들에게 회자되는 서정시인 박용래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원도심 활성화를 위해 추진하는 많은 정책 가운데 둔산지역이 무대예술과 전시예술의 중심지로 육성되었다면 장차 용전동을 중심으로 문학의 중심지로 육성할 수 있도록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지금의 문학관은 중심부에 박힌 하나의 말목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역사발전 함정은 공간적으로 사각지대가 있고, 시간적으로 과도기가 있으며, 원인으로 취약요인이 있고, 사회적으로 소외 계층이 있다. 이제 지방자치 선거를 앞두고 수많은 정책 공약들이 ?아져 나올 것이다. 표를 따라다니면서 문제의 본질을 외면한 달콤한 정책들만 나열되고 있지는 않는지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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