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읍·면 단위에 가면 다방은 공론 또는 재야의 의견인 향론(鄕論) 생성의 장이었다. 신문과 커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커피점의 공론 기능은 뿌리를 들추자면 그보다 훨씬 깊다. 원시적 신문 형태인 로마 '악타 디우르나'나 중세사회 서한신문과 필사신문은 커피 안 마셨을 때 얘기니 빼고, 1660년 세계 최초 일간지 '라이프치거 차이퉁겐'이 나오기 이전에도 그랬다. 17세기 영국 청교도혁명에서 왕정복고까지 20년간 길거리 뉴스 전단지는 3만여 종이었다. 6·25 전쟁통에 전시 속보판 형태로 나온 초창기 중도일보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또 겹쳐진다.
요즘의 보수지와 진보지 이상으로 당시 영국의 신문은 왕당파와 의회파로 진영을 갈라 싸움질했는데 이 틈바구니에 '언론의 자유' 개념이 싹텄다. 1702년 영국 최초 일간지 '데일리 쿠란트'가 창간되고 정치적 관심은 최고조였지만 문맹률이 높아 문제였다. 커피가 유럽에 전파되자 신문 읽어주는 남자가 있는 커피하우스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커피하우스에서 밤늦도록 격하게 토론하는 모습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처럼 커피의 쓴맛, 신맛, 단맛, 떫은맛처럼 다양한 의견이 집산하는 저널리즘이 커피하우스에서 싹튼 건 우연이 아니다. 아쉽게도 자판기 커피보다 10배 비싼 별다방, 콩다방 커피를 마시는 지금은 그렇지 않다. 화장실에 가지고 가고 버스도 타고 주머니에도 들어가는 종이신문의 장점을 스마트기기가 가로채고 있다. 그러나 뉴스 소비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30분짜리 TV뉴스를 옮기면 신문 한 면의 반 정도에 그친다”는 미국 CBS 앵커의 말처럼 깊이와 맥락에서 최강자다. 신문은 대체재나 보완재 어느 걸로든 여전히 강자다. 녹차가 커피를 대체할 수 없지 않겠는가.
물론 커피점도 신문도 변한다. 소득 수준이 2만 달러로 넘어가면 커피 소비가 급증한다는 통설 이상으로 거리마다 커피숍이 즐비하다. 그곳에 가면 디지털 유목민이 된다. 사람 아닌 미디어와 교제한다. 한 침대에 누운 신혼부부가 카톡으로 “자기 좋았어?” 하고 묻는 세상이다. 변하지 않는 건 없다는 말 빼고는 다 변한다.
입맛도 변한다. 다방커피-자판기커피-커피숍커피를 거치며 그래도 입맛은 잘 적응했다. 미각은 디지털화 안 되는 마지막 아날로그 감각인가.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융합된 '디지로그'의 최전방에서 버티는 신문의 속성도 그랬으면 하는 건 희망사항이다. 하지만 고품질 정보에 대한 욕구에 더 밀착하고 멀티미디어 시대에도 유효한 뉴스 생산 시스템을 구축하면 신문이 커피하우스의 인기 정도는 회복하지 않을까?
약간은 부질없고 약간은 전문적인 궁금증을 안고 지난 18일 부강 S다방을 들러봤다. 세종특별자치시 편입지역이다. '아버지 박 대통령'의 수도 이전 계획(백지계획) 때 지어진 금강변 별장에 살 때 이래 처음이니 실로 오랜만이다. 조치원, 부강, 신탄진 오일장 서는 날에 가끔 들르던 다방이었다. 신문 챙겨주던 마담은 없지만 비치된 신문을 토씨 하나 안 빼고 읽었다. 아메리카노로 길들여진 입맛이지만 설탕 두 스푼, 크림 두 스푼이 든 커피도 꿀맛 같았다.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신문의 발달이 커피점의 발달과 공유하는 역사에 가만히 속으로 감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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