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우영 충남대 심리학과 교수 |
흥미로운 것은 '짱'을 먹었던 그 친구가 선생님들한테는 꼼짝도 못했다는 것이다. 선생님 앞에서 그 친구는 다른 학생들과 똑같은 학생일 뿐이었다. 심지어는 선생님이 비합리적인 지시나 요구를 하더라도 별수 없이 선생님 말씀을 따를 뿐이었다. 어쩌면 학생들이 선생님을 폭행했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나오는 요즘에는 상상하기 쉽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담배를 빼앗겼다고 선생님을 주먹과 발로 폭행하는 학생들이 나오는 세상이다. 또한 그 당시에는 소위 '왕따'가 없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집단 괴롭힘을 당하고도 남았을 친구들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특정인을 '왕따'로 삼아서 괴롭히는 일은 없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 과거에 선생님은 새로운 지식을 가르쳐주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넘어서는 존재였다. 선생님은 학생을 하나의 통합된 인격체로 만들어주는 존재였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 속에는 그런 존재에 대한 존경심이 내포돼 있는 것이다. 예전에 선생님의 한 마디에 학교의 '짱'도 고개를 숙였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을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존재에 대한 존중이 있었던 것이다. 학생들이 선생님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회가 선생님을 그런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학부모 입장에서 선생님은 자신의 아이를 사람으로 만들어 줄 유일한 존재였다. 빗나가려는 자신의 자식에게 매를 든 선생님에게 감사한 마음이 먼저 들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선생님을 아이들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스승이라고 믿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학생들도 사회 전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던 시대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사회는 선생님에 대한 존중을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받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서비스 중의 하나로 간주됐다. 학부모에게도 학생에게도 선생님은 그저 지식 전달의 기능을 담당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선생님에 대한 존중이 사라지면서 선생님들은 폭력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학부모도 학생도 선생님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에 대한 존중이 사라진 시대에 나타난 또 다른 문제 중의 하나는 '왕따'와 같은 학교폭력이다. 선생님의 존재감이 약화되자, 학내에서 약자에 대한 폭력이 증가한 것이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경기의 심판을 보는 것이 선생님이다. 학교가 축구 경기장이라면 학생은 선수이며, 선생님이 심판이다.
심판의 주된 역할은 경기를 진행하고, 반칙이 일어났을 때는 주의나 경고, 심지어는 퇴장 조치를 취해서라도 선수들이 경기의 규칙을 지키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심판에게 권한이 있어야 한다. 권한이 없는 심판의 지시를 선수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학교폭력에 대한 다양한 대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런데 많은 대책들이 선생님들의 권한보다는 책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회가 심판의 권한과 경기운영의 자율권은 대폭 제한하면서 책임만 계속 물으면 선수들은 심판을 더 우습게 여기고 심판의 지시를 무시하게 된다. 그 결과, 반칙은 줄어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증가하게 된다.
학교폭력을 포함한 다양한 학교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심판의 권한과 경기운영의 자율권을 늘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기적으로는 사회적 차원에서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을 살려내야 한다. 선수들은 자신들이 존경하는 심판이 나오면, 옐로카드나 레드카드를 꺼내지 않더라도 심판의 지시를 믿고 따르게 된다.
존경하는 심판이 있는 경기장에는 무질서와 폭력이 존재할 수 없다. 선생님이 존경받는 사회에서 학생은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고, 그 때야 비로소 학교는 하나의 완성된 인격체를 만드는 공간으로 살아나게 된다. 선생님이 살아나야, 학교가 살아나고, 그래야 나라가 살아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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