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국 홍익사상연구소장 |
만물이 생할 때는 머리부터 나오니 갑자가 양의 머리라면 갑오는 양의 꼬리요 동시에 음의 머리가 된다. 그래서 '갑오갑자꼬리'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갑오갑자꼬리'는 동학혁명 당시에 나온 것이며 투전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매천황현의 『오하기문』이란 글에 실려 있다. 화투놀이에서도 두 장의 패로 끗발을 잴 때, 가장 높은 수 9를 '갑오'라 부르는 것도 이에서 연유한 것이다. 자(子)와 오(午)는 음양의 극수자리인 9가 되기 때문이다. '갑오갑자'에서 갑자(1864)는 고종이 등극한 원년이다. 그리고 최제우가 사형을 당한 해이고,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해는 갑오년(1894)이다.
아마 동학혁명을 주도했던 전봉준이 퍼뜨린 문구일 것이며, 구시대는 사라지고 새시대가 돌아올 것임을 암시한 글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 뜻을 전승하려는 듯, 암울한 선천시대는 물러가고 새희망의 후천시대가 도래하기를 바라면서 민중들은 투전놀이 할 때마다 '갑오요!'하고 외쳤을 것이다. 하여간 불행하게도 동학전쟁은 외세의 개입으로 패배하였고, 이 과정 속에서 다시 '갑오갑자꼬리'를 꺼내든 사람은 강증산 선생이다.
그가 말한 “갑을청룡(甲乙靑龍) 뉘아닌가 갑자꼬리 여기 있다”하니 갑오를 가리킨 뜻이겠고, “그때가 오면 무위이화로 내일이 이루어지리니 갑오갑자꼬리라” 하니 역시 장차 다가올 갑오년을 염두한 말이겠다. 또 '갑오갑자꼬리'를 언급한 사람이 이주역으로 이름났던 야산선생이다. 그는 갑오년(1954)에 '가봐야 안다'는 갑오갑자꼬리의 비결문을 인용하면서 신도(神道)행사 하였다.
두 분 모두 갑오년(1954)에 비중을 두고 여러 행사를 하였으니 이분들만이 아니고 당시의 사조(思潮)가 갑오로 세상이 변혁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120년 전, 4대강국의 침략 속에서 국론이 분열되고 전쟁이 있어났지만 결국 36년의 일제압제를 당했고, 이후 남북으로 두 동강이 나버렸다.
그리고 현재도 여전히 우리나라는 4대강국의 분쟁의 회오리 속에 놓여 있다. 세월은 흘러 또 다시 갑오년이 도래하였다. 지금은 후천시대다. 두 갑(甲)전 갑오년은 후천의 문이 열리지 않은 때였고, 지금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후천개벽이 되었다. 군주제와 민주제로 선후천을 구분하는 잣대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선천이 분열의 시대였다면 후천은 통합의 시대다. 봄여름의 기운이 뿌리에서 줄기ㆍ가지로 나누어지는 시절이 선천이라면 가을겨울의 귀근하는 시절이 후천이 된다. 그리고 후천은 가을의 금(金)기운으로 온다.
납음(納音)오행으로 갑자는 '해중금(海中金)'이라 하니 바닷속 금은 꺼낼 수 없고, 갑오는 '사중금(沙中金)'이니 갑오년의 모랫속 금은 꺼내 쓸 수 있다. 따라서 갑오년은 후천의 시발점이 된다. 계사년은 아마 분열의 극치였을 것이다. 12지신중에 뱀만 혀가 두 개여서 그런지 모르겠다. 어느 고등학생이 '안녕들하십니까'라는 대자보 게재에 교장이 고소하는 참으로 개탄할 수밖에 없는 씁쓸한 교육현장, 국정원사건 문제로 정치계는 기진맥진하고 경제는 노사간의 한없는 철도평행선을 보는 것 같다. 아마 계사년이라 그랬겠지 라고 자위하고 싶다. 반면에 갑오년 이후는 분열에서 통합이 시작되는 해라 볼 수 있다. 갑자년 머리에서 꼬리까지는 나무뿌리에서 천만가지로 분열하는 모습 그래야만 살 수 있었다면, 갑오년 이후부터는 천만가지 기운이 하나의 뿌리로 귀일하는 모습, 이것이 후천시대의 모습이요 이래야만 살 수 있다.
교육ㆍ정치ㆍ경제가 각자 합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충청ㆍ전라ㆍ경상도가 합하고, 남북이 하나로 합하고 지구촌이 한 가족이 되는 세상, 때가 오면 때를 따를 줄 알아야 하니 모든 것을 합하고 합해야 하는 것들이 갑오년에 생각할 수 있는 주제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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