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상윤 건양대 병원관리학과 교수 |
2009년 7월 전재희 보건복지부장관은 미국 의회 상원 방문자센터의 초청연설에서 한국 의료보장제도의 운영 노하우를 미국에 제공하겠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강원도 한 시골에서는 양수가 터진 임산부가 응급처치를 받지 못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한국 의료가 말 그대로 외화내빈(外華內貧)임을 엿보게 만드는 상황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싸한데 하나하나 뜯어보면 의사, 병원 직원, 소비자 모두가 불만인 구조다.
지난해에는 10년 이상 두 자릿수 외형성장을 보이던 국내 최대의 5개 병원 중 4개 병원이 적자를 기록하자 의료시장도 이제는 포화상태에 도달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국내 2000여 개의 중소병원들이 처한 사정은 더 딱하다. 적자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병원 문을 닫게 될지 모르는 막막한 상황에 내몰려 있다. 당연히 의사들의 임금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눈치 빠른 예비 의사들은 외과와 같이 인기 없는 진료과목에는 지원조차 하지 않는다. 힘만 들고 환자들에게 좋은 소리 못 듣고 돈벌이도 안 되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간호등급제 도입은 지방 병원들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간호사들의 마음은 여전히 서울행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덕분에 간호사들의 임금은 잔뜩 올랐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보건의료 직종의 박탈감은 더욱 커졌다. 요즘 직원 100명 규모의 중소기업 근로자의 초임 연봉은 2500만 원은 된다. 그러나 동일 규모 중소병원의 행정직원이나 방사선사와 같은 보건의료직 근로자들의 초임 연봉은 2000만 원을 넘기 어렵다. 의료도 이제는 산업이라고 한다. 산업이 성장하려면 우수한 인재들이 투입되어야 한다. 하지만, 임금이 너무 적으니 우수한 두뇌들은 병원 취업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의사들만으로 의료산업이 성장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요즘 의사들을 만나보면 공격적인 보험료 삭감으로 죽을 맛이라고 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건강보험재정의 건전성을 유지해야한다는 목표 하에 진료기록을 이 잡듯이 뒤지고 진료비를 삭감하는데 만전을 기하는 탓이다. 자연히 심평원과 의사들은 견원지간(犬猿之間)이 되었고, 이것 또한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과 같다. 실제 이들 둘 사이에는 소송전이 끊이질 않고 있다. 의사들은 도대체 삭감 항목이 너무 많아 무엇이 삭감될지도 모르는 채 진료를 해야 하는 입장이라고 한다. 의약분업 사태 이후 10년 이상 의사들의 목줄을 죄는 의료정책만 있었다는 것이 의사들의 인식이다.
의료계는 또한 지난 10년 동안 의료수가 인상률이 물가인상률의 40%가 채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병원은 빚을 질 수밖에 없고 직원들의 월급은 올려주기 어렵다는 것이다. 병원 현장에서 환자들을 위해 일하는 근로자들은 200만원 월급 받기도 힘든데 반해 통제기관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평균 월급은 5백만 원씩이나 된다고 하니 현장 근로자들은 허탈할 수밖에 없다. 현장이 무시되니 현장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사람들의 사기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병폐 중의 하나는 관료주의가 현장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이다.
미국이 세계 최고의 지위를 굳건하게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모든 답은 현장에 있다는 진리를 믿고 실천하는 현장행정 때문이다. 유럽 시민들이 정부를 신뢰하는 이유는 관료들이 책상을 지키기보다는 현장을 직접 찾아가서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의료도 현장의 목소리가 정책에 반영되는 시스템으로 바뀌어야 한다. 지금은 병원과 의사들의 사기를 높일 수 있는 정책이 나와야 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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