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정신과 스승의 정신은 상통한 데가 있다. 충청도는 게다가 선비문화의 중심이어서인지 고린내 나는 식민사관으로 덧칠한 선비정신이 아까울 때가 있다. 대전 송촌동의 아파트이름으로 맥이 이어진 것만도 다행이다. 요즘 각계 인사(人士)나 명사(名士) 칼럼에는 노블레스가 '닭의 벼슬', 오블리주가 '달걀 노른자'라는 풀이가 유행처럼 번진다. 닭의 사명이 호사스러운 벼슬 자랑에 있지 않고 알 낳는 데 있다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가진 자, 누린 자의 의무'를 강조한다. '선비정신'이면 왜 안 되는가 싶기도 하다.
그게 싫으면 필자가 최초로 만든 '계관(鷄冠)정신', '계관문화' 용어를 살리면 어떨까 한다. '계관'은 닭 벼슬로 벼슬(직위, 직책)의 상징이다. 옛날 장모님들이 닭 잡아주신 뜻은 몸보신 말고도 닭의 오덕(五德)을 갖추라는 심오한 뜻이 있었다. 닭 벼슬은 문(文)이며, 예리한 발톱은 무(武), 싸움에 용감해 용(勇), 나눠먹어 인(仁), 때 되면 꼬꼬댁 알리니 신(信)이다. 물론 여자가 바라는 남자의 미덕은 따로 있다. 5덕 아닌 마당쇠, 모르쇠, 자물쇠, 구두쇠, 변강쇠 등 5쇠다. 기사도는 날 샌 지 오래다.
이쯤에서 우리집 가련한 개미용사(勇士)들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화분에 개미가 생겨 알약 몇 알을 그 주위에 놓아두었다. 그랬을 뿐인데 여왕개미, 처녀개미 가리지 않고 전멸했다. 공동육아, 불임계급, 복수세대로 세팅된 개미사회의 진사회성(眞社會性)은 처참히 씨가 말랐다. 일개미는 여왕벌이 자매를 낳게 하는 쪽(3/4)이 직접 낳는 쪽(1/2)보다 혈연도가 높다는 데 착안해 집단자살의 미스터리를 추리해냈다. 흑기사처럼 자매개미 대신 죽어주려 했거나 개미 특유의 기부용 '사회성 위(胃)'(social stomach)의 음식을 꺼내 뽀뽀하듯 나눠주다 당한 변이었다. 개미에게도 기사와 깡패는 종이 한 장 차이였나. 영어의 기사 '나이트(knight)'는 독일어로 '놈, 녀석'쯤 되는 '크네히트(knecht)'와 뿌리가 같다.
말 탄 '기사(騎士)'도 당연히 '선비 사'를 쓴다. 주관적인지는 몰라도 연말연시 열혈 기부자들에게서 가장 좋은 의미의 기사와 한국적 인간형인 선비의 모습을 모두 발견한다. '기부(寄附)'와 '기브(give)'는 묘하게 의미가 일치한다. 사랑의 연탄 배달, 김장과 동지 팥죽 나눔까지 세밑을 훈훈하게 데운다. 백만·억만장자 아니어도 나눌 게 있다. 문사(文士)의 글 한 줄도 나눔문화를 싹 틔운다.
심심풀이로 풀어본 내 인디언식 이름이 '욕심 많은 태양의 전사'란다. 오, 대단히 마음에 든다. 이때 전사(戰士)도 '선비 사(士)'다. '놈 자(者)'가 아닌 게 어딘가.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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