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도묵 국제라이온스 356-B지구 총재, 대전·충남 경영자 총협회장 |
요즈음 인터넷 상에 돌아다니는 이야기 중에 '국밥'에 얽힌 글이 있다. 그 이야기는 여덟 살 정도 된 여자 아이가 눈먼 아버지를 이끌고 국밥집에 간 이야기다. 몸에서 풍기는 냄새며, 행색으로 보아 거지가 분명했다. 장님인 아버지를 이끌고 느릿느릿 들어서는 것을 바라본 주인은 퀴퀴한 냄새라도 몰아내듯 다급하게 내쫓으려 한다.
“이봐요, 손님도 있는데 다음에 와요.”
하지만 이들은 구걸하러 온 게 아니고 국밥을 먹으러 왔던 것이다.
“순댓국 두 그릇만 주세요.”
딱 하나 남은 중간 자리에 앉자, 이들이 못마땅한 주인은 아이를 계산대 앞으로 불러 세워 귀엣말을 한다.
“지금 그 자리는 예약되어 있어서 음식을 팔 수 없다.”
그러니까 냄새나는 이들을 빨리 내쫓고 싶었던 게다. 주눅이 든 아이는 시무룩해지며 애걸한다.
“아저씨, 빨리 먹고 갈게요. 오늘이 울 아빠 생일이에요.”
아이의 손에서 나온 돈은 꼬깃꼬깃 접힌 천 원짜리 몇 장과 한 움큼의 동전이었다. 그동안 구걸해서 모은 돈이 분명했다. 주인은 순댓국을 그들 앞에 배달하고 속히 먹고 나갈 것을 주문하며, 계산대로 돌아와 그들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아빠 내가 소금 넣어줄게.” 아이는 제 그릇에서 고기와 순대를 꺼내 아빠 그릇에 가득 담았다. 보지 못하는 아빠에겐 소금을 넣는다 하고 제 것을 옮긴 것이다.
“아빠, 어서 드세요. 내 김치 올려줄게.” 이 모습을 바라보던 주인은 얼굴빛이 불거지며 그들을 더 이상 바라보지 못한다.
나는 이 두 이야기에서 주인들의 모습을 눈여겨보고 싶다. 어려운 사람을 극진히 배려하는 우동집 주인과 반대로 어려운 사람을 내치려했던 국밥집 주인의 상반된 행동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동집 주인이나 국밥집 주인이나 똑같은 사람이다. 또 우동을 먹으러 간 세 모자나 순댓국 먹으러 간 두 부녀나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귀하게 만들 수도 있고, 천하게 만들 수도 있다. 우동집 주인은 자신을 귀하게 만들었지만, 국밥집 주인은 자신을 거지만도 못한 아주 천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어찌 보면 외모는 깔끔했을지 몰라도 여덟 살배기 거지 소녀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는 부끄러운 존재로 추락한 것이다.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어려운 사람에겐 바람이 차다. 그들의 차갑게 식은 몸을 녹여줄 우리의 따뜻한 손이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된다. 내 주위에는 찬바람에 떠는 사람이 없는지 살펴볼 일이다. 그들의 추위와 한기를 지우기 위해 배려하고, 나누는 연말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 마음에는 누구나 다 존엄한 인간이라는 인식이 먼저 있어야 한다. 커다란 배려보다 조금이라도 상처를 주지 않는 마음의 배려가 더 중요하다.
노숙자, 결손가정, 소년소녀 가장, 양로원, 무너진 다문화 가정…. 우리 곁에는 따뜻한 손길이 미쳐야 할 곳이 너무도 많다. 물론 이들에게 힘을 보태기 위해 배려한다고도 하지만, 그보다 봉사는 자신을 귀하게 만들고,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다. 이 연말 다 같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따뜻한 배려 속에서 가는 해를 보내고 오는 해를 맞았으면 좋겠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