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양행궁도 |
아산시가 온양행궁에 대한 복원과 재연을 고민하기에 앞서 기존 문화재와 유물들을 수집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온양행궁은 조선 초기 태조 5년(1396)에 원(院)을 짓고 임시행궁으로 사용됐으며, 세종 15년(1433)에 25칸으로 확대되면서 행궁으로서의 형태가 갖추어졌다. 이후 정유재란 때 소실됐던 행궁을 현종 6년(1665)에 어실, 온천방 등 100여 칸이 만들어졌다. 조선 초기 태조부터 말기 대원군까지 왕을 비롯한 최고 권력자들이 이용한 곳이다.
이 후 일제강점기 때부터는 일본인들에게 넘어가 온양관(溫陽館)이란 숙박시설이 지어지면서 온궁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온양관을 지을 때 온궁의 지석이 사용됐지만, 온양관도 6·25전쟁 때 미그기에 의해 무너졌다.
이때 온궁을 지탱했던 지석이 인근 상가로 흘러들어갔고, 몇 해 전까지 인근 A씨의 상가 디딤돌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학자는 “A씨로부터 온양관이 6.25전쟁 때 폭파된 후 지석을 자신의 집으로 가지고 와 디딤돌로 사용했다는 말을 들었고, 그 돌을 몇 해 전 그 집을 갔을 때 목격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아산시가 온궁복원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자 A씨는 지석에 대한 논란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했다.
과거 온양행궁은 온천에 대한 효능이 탁월해 지어진 것으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건조물이다. 현재는 온양관광호텔 내 영괴대비(靈槐臺碑)와 신정비(神井碑)를 제외하고는 그 형태를 찾아볼 수 없다.
현재 아산시는 온양행궁에 대한 복원 또는 재연을 검토하고 있다. 시는 복원의 필요성과 타당성, 공감대는 충분하다고 보고 있지만 사업비 확보와 문화재지정의 어려움 등의 문제점을 들어 재연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중요한 온양행궁 재연에 앞서 흩어져 있는 문화재와 유물들을 수집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편 조선시대는 온양행궁, 일제강점기때에는 신정관, 1967년 온양관광호텔이 지어졌고, 1960~1970년대에는 우리나라 대표 온천 신혼여행지로 각광을 받았고, 2008년 수도권전철이 개통되면서 한해 수백만명이 온양온천을 찾고 있다.
아산=김기태 기자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