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상일 대전대 경제학과 교수 |
이등박문, 이토 히로부미, 그는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일본인이다. 그는 1841년 야마구치(山口)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영국 유학을 했고 메이지 헌법 제정을 주도한 일본근대화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초대 총리대신을 비롯해 4번이나 총리직을 역임했으며 초대 조선통감을 지낸 인물로서 당시 조선과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가였다.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고 1984년까지 1000엔짜리 일본화폐의 모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그를 을사조약과 관련해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를 주도한 침략의 원흉으로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안 의사에게 암살된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안 의사를 위대한 독립운동가요 평화주의자로 존경하고 있지만 일본에서는 범죄자,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있다.
안 의사가 이등박문을 살해한 것은 개인적인 감정이나 편향된 종교관에서가 아니라 동양평화라는 거대한 이상에서 볼 때 이등박문이 최고의 암적 존재였기 때문이다. 안 의사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암살자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맹목적 순교자도 아니고 철없이 소영웅주의에 휩쓸려 행동한 것도 아니다.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평가하는 것은 안 의사와 한국인과 중국인을 모욕하는 일이다. 그가 암살 이유로 제시한 15개 항과 감옥에서 쓴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한 번 읽어 보면 안 의사에 대한 평가가 180도 달라질 것으로 믿는다. 안 의사는 이 책에서 일본이 3국 간섭으로 인해 얻은 뤼순을 청나라에 돌려주고 한·중·일 삼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자고 제의했다. 또 세 나라에서 파견한 대표로 평화회의를 조직하고 세 나라 청년으로 구성된 군단을 편성하고 이들에게 2개국 이상의 언어를 배우게 하며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 화폐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그의 이런 구상은 국가연합(UN)보다 10여년 앞선 것이며 오늘날 유럽연합과 매우 흡사한 주장을 한 것이다. 그러기에 국제적으로 안 의사가 테러리스트로가 아닌 독립운동가로 평가 받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안 의사의 이등박문 저격 사건은 자국 내에서 벌어진 한국인에 의한 일본 전 총리에 대한 살해사건이기 때문에 일본에게는 사과하여야 하고 한국에게는 유감을 표해야 한다. 그러나 완전히 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안 의사가 단순히 조선 침략에 대한 반발을 넘어서 한중일 동양평화를 주장하였고 중국인에게 일본 침략의 위험성을 알려 준 고마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홍레이 중국 외무부 대변인도 안 의사를 “중국에서도 존경받는 유명한 항일의사”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등박문은 일본인에게는 좋은 아버지였지만 조선과 중국에게는 나쁜 아저씨였다. 일본은 좋은 아버지였음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나쁜 아저씨였음을 시인해야 한다. 하루라도 빨리 시인하는 것이 서로에게 유익하다. 안 의사는 일본은 망하고 조선과 중국이 번영하는 것이 아니라 세 나라 모두 평화롭게 번영하는 것을 이상으로 제시했다. 이 이상을 이등박문과 일본제국주의가 깨기 때문에 총을 쏜 것이다. 일본의 자국 내에서의 기여를 바탕으로 하는 이등박문에 대한 평가는 그에 대한 완전한 평가가 되지 못한다. 그가 중국과 한국에 준 고통을 동시에 고려해 보다 객관적으로 해야 한다.
이등박문은 마치 집안에서는 자식을 잘 거느린 아버지로 평가할 수 있으나 밖에서는 남의 재산과 영토를 침략한 자다. 자기 등 따뜻하고 배부르다고 남의 재산을 탐낸 아버지를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우를 저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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