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 문화부의 문화는 좁은 의미(협의)의 문화다. 예술 자체와 거의 동격인 문화재청, 문화원의 문화도 협의다. '기부문화'처럼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의 공유를 나타내면 넓은 의미(광의)의 문화다. 문화의 투구를 쓴 것에는 출판문화도 있다. 우리는 그 전통이 굉장해서 조선 정조 때만 4000여권의 책이 편찬됐다. 이런 문화적 기반을 토대로 조선왕조는 500년을 붓 든 선비가 칼 든 무반(武班)을 다스렸다. 세계사에 희귀하게 정치가와 시인이 한몸인 문화적 등뼈를 가진 나라가 한국이다.
이 같은 지성사의 맥을 머쓱하게 하는 풍경이 정치권의 출판기념회다. 90%가 고스트 라이터(유령 작가, 대필 작가)가 쓴다고 밝히자니 낯간지럽다. 말하는 존재인 추장, 고대사회의 무당이 그런 것처럼 말하는 존재인 정치인은 권력자다. 말로 감동시키든 복장 터지게 만들든 입에서 비단이 나온다는 '구라(口羅)'라도 잘 쳐야 알아준다. 믿으면 낫는 구라마이신이라도 써야 하는데 이제 글로 갈아탄 것인가.
아닌 듯하다. 정치인에게 말은 포기되지 않는다. '임금 군(君)'은 우두머리 '윤(尹)'과 입 '구(口)'의 합성이다. 말하는 우두머리가 임금이고 대통령이다. 회사에서는 회장, 사장이다. 한비자는 군주를 응시자, 관찰자인 '눈(目)'으로 표상한다. '귀'의 리더십인 맹자에겐 듣기, 경청이 덕치의 조건이다. 14일 출판기념회를 연 권선택 전 국회의원의 책 제목이 『경청』이다. 육동일 충남대 교수는 그 이틀 전(12일), 안희정 충남지사는 지난 토요일(23일)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해당 안 되는 사례엔 미안하지만 지금 쓰는 건 문화현상에 대해서다. 매사는 이유(reason why)가 있어야 가치가 있다. 그 뚜렷한 이유가 한도액이나 회계보고 의무 없는 5만~10만원, 많게는 50만~200만원의 두둑한 선거용 실탄(자금) 모금이다. 책을 공짜로 주면 기부행위 금지에 걸린다. 준조세 성격의 얼굴 도장이 박힌 봉투에 사적 후원금이라 규제가 불가능하다. 세 과시도 주요 기능이다. 지난 대전시장 선거 때 출판기념회에 “오다 돌아간 인원까지 합쳐 1만명” 주장이 회자된 것도 같은 이야기다.
대략 경쟁률을 점쳐 단체장, 지방의원, 교육감 등 2만명 가량의 잠재적인 수요에 출판사들이 눈독들이고 있다. 이를 위해 잘려나갈 나무가 좀 아깝다. 스토리이건 약이건 우리 몸에 상충되면 상태가 나빠지는 '노시보'가 온다. 땀과 철학, 혼을 담지 않은 출판물에 할머니의 약손, 플라시보 효과가 있을까. 수타면 면발같이 잘 빠진 글도 소용없다. 출판 룰이 안 닿는 정치동네의 '책'은 없는 출판기념회는 지방선거일 전 90일인 내년 3월 6일까지는 계속된다. 한국의 선거는 출판문화라 고쳐 부를 것도 없는 출판기념회장에서 또다시 시작되고 있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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