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종국 서예가, 전 대전시의회 의장 |
가을철의 과일 나무에 탐스럽게 익은 풍요로운 맺혀지기까지는 이른 봄부터 쌀쌀한 날씨, 모진 비바람과 따가운 햇볕을 이겨내어야만 했듯이 우리네 삶에 있어 세상만사가 어찌 쉽게 얻어지는 행복이 있겠는가?
그러기에 언제부터인가 우리네 선인(先人)들은 한가지의 목표를 세우고는 10년을 최소 기간으로 설정하고 뼈를 깎는 아픔으로 그것 하나에 온몸을 바쳐 정진했던 사실을 한석봉(韓石峯) 모자의 이야기나 옛날 세상을 달관했던 도인(道人)들의 행적 등에서 쉽사리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이러한 소박한 진리를 뒷전으로 하고서 만사를 쉽게 해석하며 일을 쉽게 해결하려는 풍조가 점차 만연되어 가고 있다. 이는 과학만능(科學萬能)을 신봉하는 오늘날의 사회풍조, 즉 산업사회로의 이행과정(移行過程)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징후라고 풀이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시대가 어떻게 바뀌고 사회 구조가 어떠한 형태로 변한다고 할지라도 진리란 오직 영원한 것이지 결코 그것은 변해도 안 되고 변할 수도 없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고된 것보다는 편안한 것, 더러운 것보다는 깨끗한 것, 위험한 것보다는 안전한 것을 추구하는 데 그 누가 수긍하지 않을까 마는 그러나 우리가 냉철히 성찰(省察)하건데 그것이 진정 가치 있는 삶인가에는 의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고난으로 점철된 그 역사 발전의 구비 구비마다 우뚝이 자리 매김을 한 자랑스러운 우리 선조들의 발자취가 깊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그 분들의 개인적인 삶은 결코 행복했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불행하고 고난에 찬 삶을 산 세월이 훨씬 많았던 것이다. 그분들은 비록 자신들 앞에 고난과 불행이 닥쳐오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끈기 있게 극복해 나간다면 반드시 앞날에 밝은 태양이 머리에 비쳐줄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살았던 것이다.
형설지공(螢雪之功)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반딧불과 겨울의 눈빛으로 등잔을 대신하여 공부함으로써 성공했다는 고사(故事)로서 곧 어렵게 공부를 한 사람만이 성공을 거둔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중국(中國)의 고대진서(古代晉書)인 차윤 전(車胤 傳)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차윤(車胤)의 자(字)는 무자(武子)인데 그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공순하고 근면하였으며 책 읽기를 즐겼다. 그런데 그의 집안 형편은 매우 가난했으므로 기름을 구할 수가 없어 짧은 여름밤에도 등불을 켜고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는 여러 가지 궁리 끝에 수 십 마리의 반딧불(螢)을 잡아다가 호박꽃에 넣고 등불 대신에 밝혀서 글을 열심히 읽음으로 써 뒤에 상서랑(尙書郞)이라는 높은 벼슬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한 같은 책의 손강전(孫康傳)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전한다.
손강(孫康)은 어린 시절부터 성격이 깔끔하고 책 읽기에만 정진할 뿐 잡스러운 친구를 사귀지 않았다. 그도 역시 집안 사정이 극도로 궁핍하였기 때문에 밤에 등불을 켜고 책을 읽으려 해도 기름을 구할 수 없어 긴 겨울밤을 그냥 보내야만 했다. 그도 역시 궁리 끝에 하얀 눈(雪) 빛을 비추어 글을 읽을 궁리를 해냈다. 이러한 고행을 계속한 결과 그는 뒤에 어사대부(御史大夫)라는 벼슬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이 두 사람의 갸륵하고 피나는 고행이 드디어 성공을 거둔 사실을 귀감으로 삼아 뒷날 사람들은 고생스럽게 공부한 끝에 성공함을 일컬어 형설지공(螢雪之功)이라 했다.
따라서 각고(刻苦)의 노력(努力) 끝에야 학문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은 비록 시대가 바뀌고 국민의식이 달라졌다고 하더라도 변할 수 없는 진리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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