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수연 변호사 |
영조의 아버지 숙종은 대단히 과단성 있는 군주였다. 즉위(1674년)하자마자 두 차례에 걸친 예송논쟁으로 아버지 현종을 괴롭혔던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들을 축출하고 남인들로 그 자리를 채웠다. 이른바 갑인환국(甲寅換局)이라 일컫는 사건이다.
영수 송시열을 위시해 많은 서인들이 귀양을 가는 등 큰 봉변을 당했다. 5년 후인 1680년, 남인 영수 허적이 자신의 잔칫날에 비가 내리자 대궐 천막을 허락도 없이 가져다 사용했다는 것을 이유로 숙종은 하룻밤 사이에 서인들로 정권을 갈아치웠다(경신환국).
남인 영수 허적과 윤휴가 사약을 마셨으며, 많은 남인들이 곤장을 맞고 머나먼 유배길에 올랐다. 그리고 다시 8년 후, 남인계열 장옥정(장희빈)이 어렵게 왕자(경종)를 낳았다. 뛸듯이 기뻐한 숙종은 왕자가 태어난지 3개월 만에 원자로 책봉을 하고 종묘에 고하려고 하자 위기를 느낀 서인들은 맹렬히 반대했다.
분노한 숙종은 다시 남인으로 정권을 교체했다. 이를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 한다.
서인계열인 인현왕후가 폐비되고, 장옥정이 중전으로 승진됐다. 급기야는 서인의 거목 송시열이 사약을 마셨다. 정계에 남아있던 서인들은 거의 전원이 처벌을 받았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다시 5년 후인 1694년, 장희빈을 중심으로 한 남인들의 전횡에 신물이 난 숙종은 다시 서인들을 불러 들였으며, 대신 남인들을 그대로 축출했다. 갑술환국(甲戌換局)이다.
돌아온 서인들은 남인들의 씨를 말렸다. 인현왕후가 중전으로 복귀했으며, 장옥정은 세자의 어머니란 이유로 중전에서 그나마 장희빈으로 살아남았다가 중전 인현왕후에게 저주를 퍼부은 것이 드러나 사약을 받았다. 나머지 남인들도 완전히 무너져서 그 이후의 정계에서 사실상 소멸됐다.
이렇게 정계에 서인들만 남게 되자 또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됐다. 노론은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경종)에게 적대적인 반면, 소론은 목숨걸고 세자의 보호막을 자처했다. 그런 상태에서 1721년, 경종이 드디어 즉위했다. 그러자 급해진 노론들이 자파인 연잉군(영조)을 세제로 삼고 세제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게 하라고 경종을 몰아세웠다. 하지만, 소론의 역습을 받아 노론 측 네명의 대신이 한꺼번에 사약을 받는 대사건도 발생했다.(신임사화).
만약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갑자기 사망을 하지 않았다면 영조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정쟁은 더 이상 안되겠다고 판단한 영조는 즉위 일성으로 탕평책을 주창했던 것이다.
영조는 사색당파(남인·북인·노론·소론)를 골고루 등용하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이는 그를 이어받은 정조도 마찬가지였다. 이로 인해 서로 죽고 죽이는 무분별하고 잔인한 사화(士禍)가 상당히 줄어들었으며, 정국이 안정돼 조선 후기의 중흥정치가 가능했던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대탕평을 하겠다고 수시로 공약을 했다. 집권한지 1년인데, 그런 약속이 지켜지고 있는가. 지키려고 노력은 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장관 중에 한명만 호남이고, 더구나 5대 권력기관장에는 호남은 한명도 없다. 사정라인의 핵심인 비서실장과 민정수석, 검찰총장(내정자), 감사원장(내정자) 모두가 영남출신이다. 나라의 어른격인 대법원장과 헌법재판소장 역시 같은 지역 출신으로 채워져 있다. 납득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능력과 인품에 따라서 발탁을 해보니 우연히 특정지역 사람들이 많아진 것 뿐입니다”라는 변명은 더 이상 안했으면 한다. 탕평책은 이런 치우치는 결과가 생기지 않도록 사전에 노력해야 하는 정치이념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나라 전체에서 인재를 골고루 등용했으면 한다. 어느 지역이나 인재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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