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동운 음악칼럼니스트 |
'5000' 혹은 '6000' '6대 4' 혹은 '5.5대 4.5'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보자. 5000과 6000은 음악학원 시급 강사료다. 마찬가지로 6대 4나 5.5대 4.5 역시 갑과 을의 강사료 분배구조다. 뭐 아르바이트 시급으로 나쁘지 않다고 반문하겠지만, 전문 교육을 받은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어딘지 모르게 부당하다. 또한, 연주비의 20~40%를 가지고 가는 예식이나 행사 대행업체의 횡포는 이보다 더욱 심각하다. 이러한 처우가 학창시절 학원 아르바이트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대학 졸업 후에도 음악학원과 개인 레슨, 그리고 간간이 들어오는 행사나 연주로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흔히 벌어진다.
이러한 열악한 처우는 공연예술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자행되는 일이다. 활동을 막 시작한 전문 연주자들은 협연비를 받기는커녕, 내 돈 내고 연주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또한, 서로 어려우니까 돕고 살자는 식 아니면 공연 예산이 한정되어 있다는 식으로 정당한 연주비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을 알릴 기회를 준답시고 무료 연주를 암묵적으로 제안하는 것이다.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연주자로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 보니 무대에 있어야 할 연주자가 현실의 벽을 자인(自認)하고 생계를 위해 개인 레슨에 치중하게 되고, 그 일이 자신의 본업이 된다. 안타깝다! 특히 국가와 지역의 정체성에 중요한 척도가 되는 문화 수준을 올리기 위한 문화정책과 사업에 음악가들은 피곤하다. 다시 말해, 일정한 목표 달성을 위한 문화예술 사업은 수용자에게 양질의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이점이 있지만, 위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예술가들의 삶의 질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술가가 너무 돈, 돈 하는 거 아니냐고 타박할 수도 있겠지만, 수많은 걸작을 남긴 바흐, 헨델,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리스트 등 그 어떤 음악가도 자신의 노력에 따른 대가를 정당하게 요구했고, 또한 받았다. 그러니까 순수하고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혹은 가난과 절망이라는 비극적인 삶 속에 걸작이 만들어진다는 식의 낭만 음악가는 소설 속 설정된 주인공일 뿐이다. 먹고 사는 문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신분과 직업에 무관하게 인간의 생존에 직결된다. 대부분 무소속 음악가인(freelancer musician), 음악가들은 어떠한 사회적 보호없이 이러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이러한 악순환은 어제오늘의 문제는 아니지만,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앞둔 시점에서 그리고 문화예술 예산이 증가하는 시점에서 국가와 지역의 문화 발전을 위해, 미래 문화예술계를 위해, 문화 향유자를 위해 양질의 콘텐츠 개발과 신인 예술가 발굴을 운운하기 전에 젊은 예술가들과 전업 예술가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심도 있게 고려해야 할 때다. 다시 말해서, 좋은 문화정책이 문화의 저변을 넓히고 문화수용자를 만든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그 문화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예술가들이 있었다는 점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술가들이 만드는 작품 세계는 현실을 대변하기도 하고 유토피아를 그리기도 한다. 그들 스스로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때 현실은 유토피아가 되고, 도시는 예술로 만개한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도시인의 생활과 예술은 경계가 없어지고 그들은 예술의 위대함을 노래한다.
문화소비의 시대, 예술가들은 바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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