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여주기 위함 아닌 '시민들의 자부심, 헤밍웨이'

보여주기 위함 아닌 '시민들의 자부심, 헤밍웨이'

다락방 1년간 무료로 대여해주는 '작가 위한 레지던스' 세계적 주목 재단 설립후 박물관개관·생가 복원… 당시 가구부터 가족사진까지 보존

  • 승인 2013-10-22 14:13
  • 신문게재 2013-10-23 11면
  • 김민영 기자김민영 기자
[지역 마케팅, 이젠 '인물'이 대세]4.쿠바가 아닌 미국의 헤밍웨이는 어떤 모습?

▲ 헤밍웨이 생가
▲ 헤밍웨이 생가
'노인과 바다'의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1899~1961).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쿠바를 떠올린다.

그도 그럴 것이 195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순간 그는 “이 상을 받은 최초의 입양 쿠바인이다. 그래서 행복하다”며 쿠바에 감사 인사를 전했다. 쿠바 아바나에 가면 헤밍웨이의 흔적은 더욱 짙다. 그가 자주 가던 카페와 자주 마셨던 술, 작품이 쓰여졌던 공간, 사색을 즐겼던 공원까지도 기념하고 있다. 헤밍웨이의 실물크기 조각상도 쿠바 곳곳에 가면 만날 수 있다.

헤밍웨이라는 인물 하나로 쿠바 하바나는 세계인들이 그의 정취를 맡기 위해 향하는 유명 관광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쿠바가 낳은(?) 헤밍웨이의 고향은 미국 시카고 주변의 한적한 도시 오크파크다. 그의 고향이라는 사실 자체가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헤밍웨이는 오크파크 시민들에게 '우리지역이 배출한 유명 작가'라는 자부심을 주고 있다.

사실 오크파크에서 헤밍웨이보다는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오히려 더 유명하다. 연간 100만명의 관광객이 라이트 건축물과 생가를 관람하기 위해 찾고 있지만, 헤밍웨이 박물관은 불과 1만여명 남짓에 불과하다. 유명하지 않아도 헤밍웨이의 정신과 그의 생가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하고 있다. 국내에서 유명인이 타지역에서 이미 마케팅이 진행됐다는 이유로 자신의 지역에 의미있는 공간이 남아있음에도 계승하거나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정서와는 상반된다. 오히려 이들은 타 지역의 헤밍웨이 관련 기념관이나 박물관 등과 소통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문화를 발전시키는 진정한 의미의 마케팅을 하고 있다.

▲ 헤밍웨이 박물관
▲ 헤밍웨이 박물관
▲지역을 거듭나게 한 헤밍웨이= 인구 5만명의 작은 도시 오크파크는 미국 시카고의 외각에 위치해있다. 백인들의 마을이었던 오크파크는 1970년대 들어서면서 시카고 등 주변으로 부터 아프리카계와 아시아계 등의 '유색인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만의 세상에서 갑자기 모인 다양한 인종은 자연스럽게 인종갈등을 불러왔다. 백인들은 흑인들이 이웃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반감을 느꼈고, 갈등의 골은 점점 깊어졌다. 세상이 변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의식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크파크 시민들은 갈등해결을 위한 스스로의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이때 갈등해결의 답은 지역이 배출해 낸 대문호인 헤밍웨이였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헤밍웨이의 고향에서 인종차별은 부끄러운 자화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양성 만찬'이라는 특별한 모임을 만들었다. 12명 이상의 다양한 배경과 출신을 가진 지역주민이 모여 주제를 정하고 저녁식사를 하며 토론하는 모임이다. 이 모임을 통해 인종차별에 따른 갈등해결은 물론 '다양성 헌장'도 채택하며, 평등과 조화의 도시라는 명성을 되찾았다.

헤밍웨이는 보수로 똘똘뭉친 백인들에게 다양성과 평등이라는 의식을 심어주게 되는 결정적인 키워드가 된 것이다.

▲ 생가에 전시된 사진들
▲ 생가에 전시된 사진들
▲헤밍웨이 조명에 나선 오크파크=1983년 헤밍웨이 재단이 설립됐다. 이 단체는 헤밍웨이 박물관 운영은 물론 생가를 복원·관리하는 등 그의 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는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재단은 헤밍웨이의 누나인 막셀린이 기증한 헤밍웨이의 유품을 기반으로 1991년 박물관을 개관했다. 헤밍웨이의 출생부터 초년 20년에 관한 자료를 중점적으로 보유하고 있으며, 800여장의 사진과 인쇄물, 옷가지, 가구 등 일상적인 것 뿐 아니라 고등학교 시절의 학생기록부와 일기장, 청첩장 같이 개인적인 물건도 다양하다.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의 모티브가 된 간호사 아그네스 폰 커로우스키와 주고받은 연애편지도 전시돼 있다. 세계대전 참전 당시의 자료, 그가 그린 미술작품도 전시돼 있다.

박물관에서 멀지않은 곳에는 그의 생가가 살던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돼 있다. 이곳은 그가 1899년 태어나 6살까지 살던 집으로 그의 외할아버지가 지은 빅토리아 양식의 집 형태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가족이 쓰던 방과 응접실, 욕실, 육아실 등과 실제 사용했던 가구와 가정용품, 가족사진 등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곳에는 '헤밍웨이의 생가에서 봉사하는 자신의 삶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90세의 자원봉사자부터 퇴임한 전직 시장까지 자원봉사하고 있는 지역민의 자부심 깊은 공간이기도 하다.

헤밍웨이 재단이 2013년 처음으로 시작한 '라이터스 인 레지던스(Writers in Residence)' 프로그램은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작품을 널리 알리고 마케팅하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헤밍웨이가 살았던 생가의 다락방을 1년간 무료로 사용하며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집필 공간과 영감이 필요한 작가를 위한 것으로 장르나 나이, 유명세 등의 제한없이 읽고 쓰는 것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원이 가능하다. 올해 첫번째 모집한 이 프로그램에는 50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1년에 1명에게만 기회가 주어지는만큼 작가들에게는 헤밍웨이의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올해 선발된 작가는 수잔 하(Susan Hah)로 해밍웨이 생가에 머물며 두번째 소설을 집필할 예정이다.

헤밍웨이 재단은 2000년부터 고등학교 3~4학년 학생들을 위한 '헤밍웨이 에세이 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2001년부터는 유치원생부터 초등학교 6학년까지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생각을 밝히는 책들'이라는 독서축제 및 책 기부 프로그램을 함께 운영하며 문학교육에 힘쓰고 있다. 대중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 및 학회를 주관해 전세계에 헤밍웨이의 문학적 가치를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버지니아 캐신 헤밍웨이 생가 자원봉사자는 “우리는 헤밍웨이를 보여주고 알리려는 것이 아니다. 헤밍웨이를 통해 지역의 정체성을 지키는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헤밍웨이는 오크파크 시민들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자부심이며, 지역을 일깨우는 멘토였다. 단지 그를 알리고 마켓팅을 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지역민 스스로가 치유받고 함께할 수 있는 공감대 역할을 하는 하나의 울타리였다.

미국 오크파크= 김민영 기자 minyeong@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는? (Ernest Miller Hemingway·1899~1961)

1899년 7월 21일 일리노이 주 오크파크(현재의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노인과 바다(1952)'로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소설가다. 이 작품 외에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 등의 유명작품이 있다.
문명의 세계를 속임수로 보고, 인간의 비극적인 모습을 간결한 문체로 묘사한 20세기의 대표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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