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혹스럽다. “음… 그냥 아무번호나 돌리면 당겨 받을게” 얼버무리며 상황 종료.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몇 번을 확인했건만 좀처럼 외워지지 않는 네자리 숫자. 혹시 건망증? 그러고 보니 지금당장 기억나는 전화번호 몇 개 안되고, 노래방 자막없이 부를 줄 아는 애창곡 하나 없다. 십 단위 덧셈에도 어김없이 서랍 속 계산기를 꺼내들고, 연초에 받아든 다이어리는 아직도 민낯이다.
늦은 퇴근길 오랜만에 탄 시내버스. 이따금 정류장 안내멘트와 벨소리가 들릴 뿐 조용하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손바닥만 한 화면에 집중. 간간이 들리는 동행과의 대화중에도 눈동자는 분주하다. 스마트폰에 잠식당한 우리들의 일상. 이른 아침 눈 뜰 때부터 파김치가 돼 침대에 눕는 순간까지 SNS를 살피고 댓글을 단다.
한 설문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3명중 1명꼴로 가족인 부모나 형제의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또 가족 외에는 기억하는 전화번호가 없거나 있어도 한두 개에 불과하다는 대답도 절반을 넘었다. 오랜 지인의 연락처 기억과 호기심 해결은 스마트폰이, 길 찾기는 내비게이션이 척척 해주는 편리한 세상. 이미 내 기억력의 대부분은 내 머리가 아닌 디지털 기기가 대신하고 있다. PC, 스마트폰, 내비게이션 등 다양한 디지털 기기에 무의식적으로 의존하면서 겪게되는 현대인의 기억력 감퇴현상 '디지털 치매'. 무언가를 암기하거나 사색하기 꺼리는 사람들. 뇌기능도 점점 위축되고 무뎌진다. 언어능력, 이해력, 판단력, 사고력 등 인지기능도 떨어지며 전에 알고있던 정보조차 스스로 불러오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다음은 전문가들이 제시한 디지털치매 자가진단법 10개 항목이다 ▲외우는 전화번호가 회사번호와 집 번호 뿐이다 ▲주변 사람과의 대화 중 80%는 이메일로 한다 ▲전날 먹은 메뉴가 생각나지 않는다 ▲계산서에 서명할 때 빼고 거의 손으로 글씨를 쓰지 않는다 ▲처음 만났다고 생각한 사람이 전에 만났던 사람인 적이 있다 ▲자꾸 같은 얘기를 한다는 지적을 받은 적이 있다 ▲자동차 내비게이션 장치를 장착한 뒤 지도를 보지 않는다 ▲몇 년째 사용하고 있는 집 전화번호가 갑자기 떠오르지 않은 적이 있다 ▲아는 한자나 영어 단어가 기억나지 않은 적이 있다 ▲애창곡의 가사를 보지 않으면 노래를 못 부른다. 만약 이중에 2개 이상 해당된다면 디지털 치매를 의심해봐야 한다.
복잡하고 바쁜 일상에서의 디지털 치매 탈출법. 숨가쁜 삶의 현장에서 한발 물러나 관망하는 여유가 필요하다. 각종 정보와 뉴스검색에 할애하던 시간에 가족, 혹은 동료와 눈 맞추며 이야기해 보자. 청명한 가을하늘 아래 시집 한권으로 잠든 뇌를 깨우고 메마른 가슴을 적셔보자.
황미란·편집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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