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중 정치부 부국장 |
박 대통령의 자서전 곳곳에는 권력에 대한 생각이 담겨있다. '권력은 국민이 부여하는 것'이라는 소제목의 글에서는 2005년 9월 7일, 이젠 고인이된 노무현 대통령과의 청와대 회담에 대한 소회가 적혀있다. 대연정을 제안하는 노 대통령에게 박 대통령은 '권력이란 국민이 부여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권력을 나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권력을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만큼 아무리 힘들어도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겁니다. 민심, 국민의 뜻이 중요하다는 점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박 대통령이 경구로 삼고 있다는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는 공자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공자는 정치가 무엇이냐는 자공의 질문에 '정치란 경제, 군사, 그리고 백성들의 신뢰다. 이 세가지 중에 버려야 한다면 군사를 버리고, 경제를 버려라. 예부터 백성이 죽는 일을 겪지 않은 나라가 없었지만 백성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나라가 설 수 없다' 무신불립의 어원이다.
약속과 신뢰의 정치인 박 대통령이 최측근인 진영 보건복지부장관의 기초연금에 대한 '양심 선언'에 마음 고생이 심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약속'과 '양심'의 충돌은 많은 말들을 남겼다. 박 대통령이 대선 복지공약을 수정하는 방식으로 추진한 국정운영 철학과 기초연금제 시행방식에 “장관 이전에 나 자신의 양심 문제”라고 맞선 진 장관의 복지철학을 두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대통령의 거듭된 사과에도 뜻을 굽히지 않은 진 장관의 행보가 박근혜 정부에 내상을 안겨 국정운영에 부담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최측근의 '항명'에 그렇게 비관할 일도 아닌듯 하다. 속내야 다 알 수 없지만 자리하나 얻으려고 대통령 눈치 보기에 급급한 인사들보다는 '배신의 아이콘'으로 전락하더라도 소신발언을 주저하지 않은 진 장관의 솔직함은 인정할만하지 않은가. 박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1979년 11월 청와대에서 나온 이후 돌아서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사람들은 뚜렷한 신념없이도 권력을 좇아 이쪽과 저쪽을 쉽게 오갔다. 서로에 대한 신의는 없고, 얄팍한 계산만이 난무했다. 원칙과 소신을 지키며 한결같은 정치철학으로 일관된 정책을 펴나가는 정치인은 많지 않다.'
복지공약 수정을 놓고 가장 많은 고민을 한 사람은 박 대통령 자신일 것이다. 대통령이라는 위치는 장관이나 검찰총장처럼 하기 싫다고 미련없이 뛰쳐나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권력은 여론에 기반한다는 것을 잘알고 있는 박 대통령이 자신의 약속을 고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자서전에'나의 사전에 약속을 깨는 일은 없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니까'라고 밝힌 박 대통령으로서는 '죄송하다'는 사과발언을 하기까지 밤잠을 설쳤을 것으로 보인다. '화려한 외치'로 얻은 점수를 잃을 수 있다는 걱정이 짓누를 수도 있다.
박 대통령은 20여년 전 어느날 이런 일기를 썼다. '권력은 칼이다. 권력이 클수록 그 칼은 더욱 예리하다. 조금의 움직임으로도 사람을 크게 해칠 수 있다. 그러므로 큰 권력은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지만 정작 그 큰 권세를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그것을 소유한 당사자이다' 민간인 입장에서 쓴 권력에 대한 생각은 대통령의 위치에 올랐더라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채동욱 검찰총장ㆍ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의 사퇴 파문으로 한동안 어두웠던 박 대통령이 1일 '제65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웃음기를 다시 찾은 것은 반가운 일이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고독하다. 최고 권력은 인의 장막과 측근들의 이해관계에 갇혀 제대로된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고립될 수 있다. 박 대통령이 일기에 적은 '권력에 대한 성찰'이 허언이 아니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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