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광의 '지봉유설'에도 '오징어 먹물로 쓴 글씨는 해가 지나면 사라져 빈 종이가 되므로 사람을 속이는 자는 이같은 간사한 방법을 이용한다'는 글이 나오기도 했다.
최근 대통령의 핵심 공약 중 하나였던 기초연금 등 복지공약 축소가 논란이다. 기초노령연금의 경우 박 대통령이 선거 유세 당시 65세 이상의 모든 노인에게 20만원을 지급한다고 했다가 지난달 26일 정부는 당초 공약보다 크게 후퇴한 최종안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세계경제 침체와 맞물려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세수 부족과 재정 건전성의 고삐를 죄어야 하는 현실에서 불가피했다”고 명분을 내세웠다. 기초연금의 지급 액수가 많고 적음을 논하자는게 아니다. 기초연금 뿐 아니라 복지공약 상당부분이 연기됐거나 대폭 축소됐기 때문이다. 더욱이 불과 9개월 전에 국민과의 한 약속을 '여건상 어렵기 때문'이란 이유로 상당기간 미룬 것이다.
대선 후보시절, 각 분야의 뛰어난 보좌진들과 연구 끝에 만들어 유권자들에게 표심을 호소한 공약이지만 대통령의 자리에서 보니 여건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이유로 복지부 장관이 사의를 표명하고, 국무총리가 업무 복귀를 촉구하는 등 국정운영 또한 어수선한 모습이다. 지난 대선에서 역사상 가장 높은 투표율을 보인 60대 이상 노인 세대는 현 정권에 사실상 몰표를 줬다. 공약을 믿고 소중한 표를 던진 유권자들의 실망감은 클 수밖에 없다.
내년 6월 4일에는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된다.
자천타천 거론되는 후보군들은 벌써부터 잰걸음을 보이며 민심을 닦고 있다. 사탕 발린 언변을 늘어 놓으며 지키지도 못할 약속들을 거리낌 없이 쏟아내는 것이다. 오래되면 벗겨져 흔적이 없어지는 오징어 먹물 같은 약속.
혹여 자신도 모르게 지키지도 못할 말을 함부로 떠벌린 적은 없는지, 우리는 물론 정치권에서는 가슴 깊이 되짚어 볼 일이다.
이영록 ·경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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