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철구 배재대 일본학과 교수 |
일본은 오랜 역사를 거치는 동안 사회구조가 매뉴얼대로 이행하는 습관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어서, 2008년 동북대지진과 같은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를 입고도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대처하는 모습에 해외 언론들은 일본인의 인내와 질서를 '인류정신의 진화'라고 극찬한 적이 있다. 이러한 매뉴얼 행동과 침착함은 이때만 드러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도쿄전력이 2012년 7월 전력부족으로 인해 10% 절약운동을 펼쳤을 때 예상을 훨씬 넘은 24%가 절약되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예를 들어 지하철 회사는 운행횟수를 제한했고 시민들은 가정과 직장에서 절전을 했다.
이것이 바로 재해에 대한 매뉴얼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칭찬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야기 하면 매뉴얼에 없으면 행동하지 못하는 피동적이고 획일적인 사회로 인식된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결국 한때 칭찬받았던 시스템이 2년 전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후유증을 만들어 내면서 지금은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원자력발전소에 위험이 있으면 정부가 위험 경고를 하고 미리 대피시키거나 국민들이 알아서 피난해야 하는데, 정부의 지시만 기다리는 국민도 그렇거니와 지시하기 위해 매뉴얼을 만드는 일본정부 모두가 지켜만 보고 있으니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는 심각히 생각해 봐야 한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도 두 명만 있으면 줄을 서야하는 매뉴얼 사회가 일본이다. 어쩌면 이게 멋있게 보일 수도 있다. 또 이것이 선진시민의 높은 질서의식이라고 자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탈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일본사람들이 불쌍하다는 생각도 든다. 인간이 본능대로 행동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희로애락을 표시하는 유일한 동물인데 이를 너무 억제하게 되면 분명 어딘가에서 그만큼의 부작용은 표출되게 마련이다.
물론 매뉴얼사회의 장점은 단점보다 많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을 처리할 때 정해진 과정(process)를 만들어 놓아 누구나 그 일을 처리하고 공유할 수 있게끔 한다는 점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손쉽게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일본의 고도성장에 주요한 동력으로 작용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또 하나를 들자면 책임소재가 분명하다는 점이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확실히 알 수 있어서 매뉴얼에 없는 여분의 일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매뉴얼에 없었기 때문에 충분한 핑계를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본 특유의 매뉴얼 문화는 최근 들어 지속적인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이른바 '매뉴얼 세대'라고 불리는 20대 청년들이다. 설명서의 지시대로 주어진 대로만 움직이다 보니 창의력과 독창적 사고, 그리고 도전정신 등이 부족하여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한다. 과거 한국의 품질 좋은 상품이 일본에서 판매가 어려웠던 이유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매뉴얼이 없어서였다고 하니 일본의 매뉴얼사회를 알만하지 않겠는가?
분명 매뉴얼 사회는 평상시에는 국민들의 생활에 지장이 없게 만드는 시스템이지만 언제 어디서 어떤 변수로 등장할지 예측하기 어려운 자연재해에 대한 대처에는 분명 한계가 보인다. 매뉴얼대로 살아가는 일본사회, 한편으로 보면 개인적인 감성과 본능을 내려놓고 살아야 하는 불쌍한 사회로 비추기도 하여 활기를 잃은 일본의 모습이 어쩌면 여기에 원인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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