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필영 공주대 경제학과 교수 |
맞다. 틀린 글 아니다. 오늘날 아빠는 허깨비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봉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3040세대는 모르리라. 50대도 모르리라. 까맣게 모르리라. 뿌듯한 가슴을…. 짜릿한 봉투 촉감을~! 1970년대까지는 '오프라인' 시대다. 그 시절 샐러리맨은 풍류가 있었다. 낭만도 있었다. 월급을 봉투로 받았으니까. 봉급날만 되어 보라. 목에 힘 들어간다. 기분 째진다. 콧노래 흥얼거리며 퇴근한다.
월급봉투 받아든 순간, 엄동설한도 봄날이요 삼복더위도 냉천골이다. 봉급날은 생일날이요 명절이다. 봉급은 마른 논에 단비요 집안의 생명수다. 그날만큼은 남편은 태양이다. 집안이 훈훈하다. 용돈 받아든 자녀는 야들야들하다. 그뿐이랴. 밥상 차림도 '특' 메뉴다. 한 달간 쌓였던 가장의 스트레스는 스르르 녹아든다.
봉급날만 그런 게 아니다. 그 전 주부터 아내는 나긋나긋하다. 행여나 봉급을 내려놓지 않을까 봐서다. 그 다음 주까지도 '봉투 약발'은 지속된다. 한 달에 3주간은 어깨 으쓱이다. 남편 체면 절로 솟고, 아빠 권위 바로 선다.
1970년대 말부터 '온라인'이란 괴물 기류가 흐른다. 은행 출입문마다 '온라인업무 개시'라는 문구가 달라붙는다. 월급봉투는 사라지고 계좌번호가 대신한다. '봉급 알전'은 통장이 삼켜버린다. 그 시절 은행은 직장과 멀리 떨어져 있다. 남정네들은 은행 갈 틈조차 없다. 자가용도 없다. 그러니 어쩌랴. 통장도 도장도 아내에게 맡길 수밖에…. 곳간 열쇠 구경도 못하는 남편, 그게 탈이다. 가장은 유리지갑도 꿰차지 못한다. 아빠는 하루아침에 머슴 팔자로 전락하고 만다.
가정 내 권력이동이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서열 1위였던 가장은 꼴찌로 곤두박질친다. 자녀 등록금도 용돈도 엄마 손에서 나간다. 외식 결정권도 아내에게 있다. 아빠에겐 TV채널 선택권조차 없다. 노숙자 신세 면하려면, 이사할 때 아빠는 강아지라도 붙들고 있어야 한다나. 그뿐인가. 남편은 틈틈이 아양 떨어야 한다. 고개 숙인 채 엉거주춤 아내에게 손 벌린다. 쥐꼬리만한 용돈이라도 쥐려면 체면은 말이 아니다. 가장은 주눅 들 수밖에…. 온라인이 몰고 온 풍속도다. 더 이상 아빠는 가장이 아니다. '가졸(家卒)'이다.
요즘 우리사회는 혼란스럽다. 점점 갈등은 깊어진다. 집에서도 소통부재다. 학교폭력은 병통이다. 정부는 먹통이고 정치권은 불통이다. 원인은 따로 있다. '온라인' 때문이다. 그건 편하고 빠르고 간단하기는 하다. 하지만 편하면 인성은 고갈된다. 빠르면 참을성 없어진다. 간단하면 경박해진다.
교육이 잘못이라고, 사회가 오염됐다고, 정치가 썩어서라고, 미흡한 제도와 법 때문이라는 등등…. 진단도 저마다요 처방도 제각각이다. 그건 바른 진단이 아니다. 근본 원인은 따로 있다. 작은 것에 있다. '가장 권위'가 실추됐기 때문이다. '아빠 체면'이 구겨져서다.
집은 최초 학교다. 가정이 위태롭다. 아빠 권위가 서지 않는다. 가장 위상이 흔들린다. 집안 기둥뿌리가 바로 서지 못한다. 주머니 가벼우면 어깨는 처지는 법. 가장의 권위는 두툼한 주머니가 세워준다. 월급봉투 없는 애비는 허수아비다. 제발, 봉투로 다오. 그래야 가정이 반듯하다. 학교가, 나라가 바로 선다. 뇌물 봉투는 사라져야 하지만, 월급봉투는 부활돼야 한다. 봉급날의 뿌듯함, 맛 좀 보자. 짜릿한 봉투 촉감이 그립다. 정녕 그런 날, 올 수 있을까? 무지개에 밧줄 걸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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