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국원 침례신학대 총장 |
집을 떠나서 이국에서 명절을 맞다보니 나이에 걸맞지 않게 갑자기 센티멘털한 감상(感傷)에 젖었다. LA 밤하늘에 잔뜩 차오르기 시작한 달이 한국보다 더욱 커져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치 갓 구워낸 호박전 마냥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것 같기도 했다. 집에는 식구들이 모이기 시작하였을 것이고 사람들이 많아져서 신이 난 어린 쌍둥이 손녀들은 잔뜩 재롱을 피우고 있을 것이다. 먹는 것에 욕심이 많은 첫째 놈은 양 손에 송편이랑 과자를 들고 돌아다닐테고, 좀 얌전한 둘째 녀석은 지금까지 제일 잘 할 줄 아는 단어인 “언니”를 연신 종알거리면서 자기 언니 뒤를 졸졸 따라 다니고 있을 광경이 눈에 밟혔다.
이역만리 다른 나라에서 쳐다보는 가을 달은 아픔이 비슷하면 서로 이웃이 된다는 동병상린(同病相燐)의 마음을 일깨우기도 한다. 집을 떠나 가족과 떨어져 있으니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나그네들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들은 역시 군복무에 충실하고 있을 우리의 젊은이들이다. 인생의 가장 푸른 시절을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젊은 영혼들에게 큰 박수와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해군에서 복무하고 있는 어느 제자가 얼마 전에 소말리아 해역 호송전대의 일원으로 파송된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대학 때 해군에 지원하고 싶었는데 시력이 약해 지원하지 못했던 나로서는 이 제자가 보낸 소식이 유독 반가웠다. 지금쯤 소말리아 연해(沿海)에서 휘영청 보름달 밝은 빛 아래 해적들을 감시하고 있을 제자에게도 마음의 송편을 전하고 싶다. 철원평야 철책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소대원들과 함께 철모에 쌀을 찧어 송편을 만들어 먹던 추억담도 덤으로 들려주면서 위로하고 싶다.
또 생각나는 사람들은 북한을 탈출해서 중국 어느 벌판에서, 동남아 어느 밀림에서, 공포와 기아에 시달리며 남으로 가는 탈출구를 찾고 있을 동포들이다. 못되고 못난 지도자 때문에 나라를 등지고 도망치는 신세라서 일 년 중 가장 넉넉하고 밝은 한가위 보름달빛을 즐기기는 커녕 차라리 칠흙같이 어두운 그믐달이 더 고마운 서글픈 사람들이다. 다행히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정착한 새터민들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 생활의 안정은 얻었겠지만 고향을 그리는 마음의 애절함은 오히려 더 절실할지도 모른다. 너무 먹을 것이 없다보니 '송편'이라는 단어도 없어져 버렸다는 북녘 고향과 식구들을 생각하면 우리 시장에 잔뜩 쌓여있는 추석음식들이 공연히 원망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정말 서글픈 추석을 맞은 나그네들은 이미 백만 명이 넘는다는 외국인 노동자와 이주민들일 것이다. 한국인 동료들은 모두 고향에 다녀왔는데 고향에 갈 수 없는 이들 외국인들에게 명절은 얼마나 쓸쓸하고 아쉬운 계절일 것인가? 유학시절을 돌이켜 보면 추수감사절 휴가 동안 모든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간 텅 빈 기숙사가 잔인하리만큼 적막해 싫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도시 전체가 텅 빈 것 같은 추수감사절 휴가 기간 동안 밥 사먹을 식당을 한 곳도 찾을 수 없었던 낭패감도 생각난다. 우리나라의 모든 가정에서 웃음꽃과 맛있는 음식냄새가 피어나는 추석날 저녁에, 차도, 사람도 모두 사라져 버린 주인없는 도시에서 한 끼 식사를 해결할 장소를 찾기 위해 헤맸을 이방인들의 초라한 발걸음이 예전의 내 모습을 연상시키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어디선가, 누구에겐가 한 번쯤 나그네가 될 터이니 이번 명절에 그러하지 못했다면, 다음 명절에는 꼭 주변에 있는 나그네의 쓸쓸한 마음을 한 번쯤 헤아려 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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