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난순 교열팀장 |
날이 밝으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하는 한 사형수가 고향의 푸른 잔디와 부모형제, 옛 애인을 만나 행복한 시간을 갖는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현실은 사방이 높은 벽으로 가로막힌 교도소에서 간수와 슬픈 얼굴의 신부가 옆에 서 있고…. 사형수는 죽어서야 비로소 고향에 돌아갈 수 있는 운명이라는 노래다.
고향을 생각할 때 우리가 받는 느낌은 대체로 오래된 날들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고향에 대해 친근한 감정을 품는다. 어떤 이에게는 고통의 공간일 수도 있겠으나 대개는 아주 깊은 정을 품고 늘 고향의 포근함을 그리워한다. 고향에 대한 내 기억창고의 첫 페이지에는 하나의 장면이 선명하게 자리잡고 있다. 10살때의 추석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예전 시골의 명절은 고향을 찾은 사람들로 동네가 왁자지껄하고 흥겨웠다.
하지만 그해 추석, 우리집은 썰렁했다. 대전에서 직장을 다니던 큰 언니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니가 사오는 새옷도 없었고 온갖 신기한 과자와 사탕이 들어있는 선물세트도 없었다. 난 풀이 팍 죽어 도무지 신명이 안 났다. 무엇보다 언니의 냄새, 달콤한 분냄새를 그리워했는데 말이다. 추석날 밤 늦게까지도 언니가 내 이름을 부르며 대문 밖에서 들어올 것만 같았다. 숙제를 하면서도 멀리서 개짖는 소리가 들리면, 부리나케 문틈으로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담장밖을 뚫어져라 바라보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엄마 아버지는 그런 나를 보시고 아무 말씀도 안하셨다.
한국인에게 고향은, 자란 곳이거나 떠나온 곳이거나 돌아가야 할 곳이다. 고향을 일찍이 떠난 이들은 힘든 처지에 놓이거나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할때, 거의 본능적으로 고향을 찾고 싶어한다. 특히 식민지 경험, 해방, 분단 그리고 6·25전쟁과 같은 역사적 사건을 겪은 우리에겐 해외 곳곳에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이산·離散)'가 존재한다.
윤이상에게 고향은 어쩌면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었을지 모른다. 통영은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면서도 끝내 돌아갈 수 없었던 고향이었다. 민족분단의 살벌한 현실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생존 시 세계 최고의 작곡가로 인정받았지만 한국은 가장 순수했던 음악가를 가장 정치적인 인물로 변형시켰다. 박정희 정권의 정치 이데올로기는 이른바 '동백림 간첩단의 두목'이란 죄를 뒤집어 씌워 오랫동안 한국에서 그의 이름은 '금기'가 되었다. 루이제 린저가 '상처받은 용'이라 칭했던 윤이상은 이역만리 베를린에서 이승에서의 삶을 다할 때까지 고향 통영 바다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추석이 다가온다. 지금 나라 안은 벌집을 쑤셔놓은 듯 소란스럽다.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처럼 가치를 잃은 이념과 사상대립은 국민들의 신경세포를 마구 건드리고 있다. 정치가를 비롯한 권력자들은 본질을 벗어난 문제로 각자의 이권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다. 그런 와중에 남북이 오는 25일부터 이산가족상봉행사를 연다. 2010년 11월 이후 3년만에 재개됐다. '이산'의 삶을 사는 실향민에게 고향은 유전자에 각인된 뿌리찾기의 상징이다.
허나 누구라 해도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고향은 한사코 떠나는 곳이다. 떠나기 위해 거기 있는 것이다. 떠나와서 병이 날 정도로 그리워하는 곳이지만 이제 다시 돌아가 살기에는 어렵게 되어 버린 곳이다. 사라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소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나는 알았다. 그것은 단지 나뿐이었다. 내가 살던 옛집은 퇴락하긴 했으나 그대로일 것이다. 늙은 배나무와 뒤꼍 대숲도 아직 남아있을 것이다. 다만, 산 너머 멀리 무지개를 꿈꾸던 10대 소녀의 마음이 더럽고 황폐해진, 쓸쓸한 중년의 여인이 되어 기웃거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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