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용우 부여군수 |
우선, 이러한 변화가 직업공무원의 입장에서는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상급기관과 소속 단체장의 눈치는 기본이고 전에는 생각도 못했던 섬김 행정을 넘어 감동 행정까지 해야 하고, 시민단체와 언론은 시누이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철밥통, 복지부동, 영원한 갑 등의 호시절의 영화는 오랜된 LP판의 흘러간 옛 노래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반면, 공직의 특수성에서 오는 정년 보장, 연금보장, 개선된 급여체계 등 직업의 안정성과 수십대 1의 난공불락의 관문을 뚫고 공직에 입성해 지역사회 핵심 인재집단으로 급부상 하고 있는 점은 신마저 탐내는 직장이라는 비아냥이 그리 싫게 들리지도 않을 것 같다.
한편, 자치 단체장은 지방자치를 뿌리내리게 한 일등공신이자 지역의 소통령에 비유될 정도로 그 권한과 책임이 날로 증가하고 있어 건곤일척의 대 혈투가 4년마다 되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자치단체장이라고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사실, 자치단체장은 법적으로는 특수경력직 공무원 중 정무직 공무원이라는 그럴 듯한 이름이 있지만 4년 계약직 공무원이자 냉정하게 말하면 임시직이다.
기본적으로 건강은 타고 나야 하고 화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눈은 반쯤 감고 다녀야 하고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리는데 이골이 나야 한다. 평생들을 욕은 한꺼번에 다 듣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왼쪽 뺨에 이어 오른쪽 뺨도 내줄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한다.
더욱이, 숱하게 들려오는 충언과 아첨의 옥석을 구분해야 함은 물론이고 충언 중에서 핵심 한마디를 골라내야 한다. 그리고 결정의 순간에는 처절한 고독과 홀로 마주한 채 냉혹한 선택을 해야 하고 그 결정에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결코 쉽지 않은 자리다.
이렇듯, 달라도 너무 다른 둘은 사실 하나의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지역발전과 주민행복이라는 대의명제 아래 공동의 이익을 창출하고 그 과실을 주민에 돌려주고, 자치단체의 연속성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특히, 서로의 관계는 집단지성이 용광로처럼 분출하는 오늘날의 시대에 과거의 권위주의적 상하 수직관계로는 안된다. 동양의 군주론으로 평가받고 있는 한비자의 리더쉽은 오늘날과 같은 민관 거버넌스의 협치 모델에는 맞지 않는다.
정관지치의 치세를 이룬 당 태종은 “조직의 위기는 리더십의 위기다. 그리고 그 위기는 기본적으로 신뢰 관계가 무너졌을 때 나타난다. 치세의 근본은 군주나 신하 한 개인이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상호 협력할 때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이처럼 자치단체장의 비전과 방향이 주민의 공감대를 얻어야 하고 공직자들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수평적 열린 리더쉽으로 조직의 공동목표를 공무원의 직업관으로 체화될 때 조직은 세대를 넘어 지속가능한 성장을 담보할 수 있다.
아울러, 공직자들은 타성과 이기주의로 정권의 부침에 관계없이 생존한다는 미국 하버드대의 토머스 패터슨 교수가 지적한 관료주의 문화로는 민선자치의 연착륙은 요원하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소신과 신념을 가지고 영혼 없는 기능인 소리를 들을 것이 아니라 단체장을 넘어 주민을 보고 일해야 지속성이 있고 보람을 찾을 수 있다.
결국, 진정한 자치는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다. 무엇보다 공직자로서의 자세가 중요하다. 서로에게 가슴 뛰던 출발의 순간이 있었다. 당선증을 교부 받던 날, 임용장을 전수받고 첫 출근을 하던 날 등 설레던 그 순간의 결연했던 마음가짐을 초심으로 유지할 수 있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이처럼 지속가능한 지역개발의 비전과 소통의 거버넌스를 실천할 수 있는 자치단체장과 이를 실현할 역량 있고 깨어 있는 직업공무원이 있는 이상, 지방자치는 오늘을 넘어 내일도 그 희망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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