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일본에서 잠시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이미 작고했지만 전 일본철도사학회 회장이였던 하라다 가츠마사 선생님은 그 시절 소중한 인연이다. “역사유산과 자료는 오늘까지는 우리의 것이지만 내일부터는 우리 후손의 것이므로 이를 잘 보존해서 물려줄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논문은 몇 년이 지나면 관심이 없어지지만 자료는 영원히 남는 것으로 가치가 있다”고 종종 말씀하셨는데 그 말은 내 마음에 새겨져 내가 학생을 가르치고 학문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길잡이가 됐다.
철도의 역사적인 자료수집과 번역, 해석 작업은 내 학문의 길에 중요한 사명이자 즐거움이 됐다. 동료들과 '조선교통사 1권'을 번역하고 관련된 전공서적을 출판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그 여행길에서 만난 그분과의 인연과 명제와도 같았던 말씀 덕분이었다. 그 인연 이후 나의 중요한 여행은 대부분 자료 수집을 위한 여행이었다. 인천 시립박물관,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서울 역사박물관, 부산 근대역사관은 우리의 추억과 역사를 잘 담아놓은 대표적인 박물관이자 내가 자료 수집을 위해 즐겨 찾는 장소이다.
유럽은 어느 곳을 가든 교회, 박물관, 극장이 있다. 영국 요크 국립철도박물관과 스위스 루체른의 교통박물관은 필자에게 감동을 준 대표적인 곳이다. 특히, 영국요크철도박물관은 300만점의 유산은 물론 자료실, 세미나실까지 갖추고 있어 부러웠다. 주말이면 가족 동반으로 자연스럽게 박물관을 찾는 모습은 더 큰 부러움을 주었다.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미래를 재창조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일상이었다.
도시의 품격은 그 도시의 역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박물관이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표면적으로는 과학과 도시구조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발전해 왔으며 발전해 나갈지에 대한 중요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마음의 눈으로 본다면 세월 속에 묻힐 수도 있는 많은 이야기를 되살려 놓았는지가 그 도시 활력의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서정오 작가는 “이야기는 기죽은 아이에게 용기를 주고 슬픔에 빠진 아이에게는 꿈을 주고 잘못한 아이에게는 매가 된다”고 했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많은 이야기가 살아있는 도시는 똑똑한 도시다. 공간속에서 만들어지는 에너지가 오늘과 내일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하지 않았는가.
지난해 가을, 대전에도 역사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지난 것에 애정이 많은 필자로서는 지금이나마 대전이 역사의 가치를 지키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무척 반갑다. 대전은 1905년 경부선 철도가 부설됐다. 경부선과 1914년에 놓인 호남선으로 인해 대전의 운명이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충청의 변두리에 불과했던 대전이 발전과 근대화의 중요 거점지가 됐다. 격동의 100년이 넘는 역사가 철도와 함께 이어졌다. 대전지역사무소 보급창고(등록문화재 제 168호), 철도관사촌 30여 채, 다수의 철도 관련 교량 및 터널, 미카형 증기기관차 129호(등록문화재 제 415호) 등 귀중한 유형, 무형 철도문화유산이 대전에 있다. 이러한 자산을 바탕으로 철도박물관 유치, 대전역 주변을 철도문화의 메카로 육성, 철도문화유산 연계 투어 프로그램 개발 등 다양한 계획을 추진 중이다.
전문가들만의 정보에서 벗어나 일반인들에게도 지난 역사와 이야기가 공개될 예정이라니 필자가 더 많은 기대를 품게 된다. 길 위에서 만난 무형, 유형의 인연이 필자에게 크고 작은 감동으로 다가왔던 경험들 때문일 것이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지난 3000년 역사를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루살이 같은 인생을 살 뿐이다”고 말했다. 하루살이로 살 것인지, 역사를 활용하며 살 것인지에 대한 선택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예측 불가능한 길 위의 인연이 우리에게 기대하지 않았던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던 것처럼 세월 속에서 건져 올린 길 위의 인연이 우리에게, 이 도시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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