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하여 지하철 7호선을 타고 한 두 정거장 지나갈 즈음에 의족을 하고 동전바구니를 든 지체장애인 할아버지 한 분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 분은 찬송가를 울리는 녹음기도 없었고, 하모니카를 불지도 않았으며 특정종교를 강요하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강조하지도 않았다. 그저 불편한 다리를 끌고 천천히 걸어올 뿐이었다. 필자는 서울 올라오면서 버스비로 절약했던 돈이 공돈이라는 생각에 할아버지의 바구니를 채웠다. 바구니에 돈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난 할아버지는 조용하면서도 또렷하게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크게 성공하셔서 대통령도 되시고, 국회의원도 되시고, 교수님도 되시고,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시고, 대한민국 최고의 훌륭한 남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점심시간대라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내가 앉아 있던 차량 안의 많은 사람들이 들었을 정도의 목소리였기에 듣고 있던 나는 상당히 쑥스러웠고 뭔가 잘못을 저질러 들킨듯한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할아버지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요즘 유행하는 힐링이 된 느낌이었다. 단돈 4000원에 이런 축복의 언어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어떤 종교지도자가 이렇게 고마운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어떤 스승이 이렇게 축복을 해 줄 수 있을까? 교회나 사찰에 헌금이나 기부를 한들 살아있는 '사람'에게 이런 축복의 언어를 즉답으로 들을 수 있을 것이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진심어린 감사의 표현을 해줄 수 있을까?
물론 목사님도 스님도 기도해 주기야 하겠지만, 표현하기 힘든 뭔가 다른 힘을 필자는 분명하게 느꼈다. 그 할아버지가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나를 축복해 주었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다.
내 앞에 계셨던 할아버지의 말씀이 끝나고 난 이후 같은 지하철 칸에 탔던 몇 분들이 자신들도 그런 축복의 말을 듣고 싶었던지 할아버지의 바구니를 채워 주었다.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잠깐 동안 그분들 앞에 서서 마치 중세시대 수도사처럼 또다시 외치고 있었다. 지폐를 바구니에 넣은 중년 아줌마에게는 그에 알맞게 훌륭한 어머니가 되라고 하셨고, 학생처럼 보이는 젊은이에게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예쁘고 착한 색시를 얻으라고, 그 상황에 맞는 언어로 수정하면서 축복해 주는 것이다. 아마 그 누구도 이 광경을 보고 '저 할아버지, 상술이 대단하네' 라든가, '듣기 싫게 왜 저렇게 떠들지'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언어란 이런 것이다. 말끔한 양복을 입고 머리에 무스를 바르고서는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고작 권력과 명예와 물질에만 사로잡혀 허우적대는 소리를 쏟아내는 것 보다는, 비록 누추하고 초라하게 보이더라도 상대방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축복하는 모습이 더 아름답지 않은가?
성경에서도 이를 증명하고 있다.
마태복음 15장 18절을 보면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라는 말씀이 있고, 잠언 16장 23절에는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그의 입을 슬기롭게 하고 또 그의 입술에 지식을 더하느니라”라는 구절이 있다. 나는 할아버지가 이런 심정에서 입술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대신 해 준 것으로 받아 들였다.
우리는 어쩌면 칭찬에 인색하게 살아온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런 점에서 주변에 칭찬할 수 있는 '꺼리'가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상대방을 칭찬해 주자.
특별히 교육을 업으로 삼고 있는 선생들은 제자들을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조그만 칭찬거리라도 찾아내어 자주 용기를 북돋아 주고 또 칭찬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나이 50이 다 되는 나도 이렇게 기분이 좋은데, 그리고 꼭 그 축복의 말대로 될 것 같은데 학생들이야 오죽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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