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음악은 도덕적 규범이나 윤리적 가치를 담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적어도 이 시대엔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의 구분은 분명했고, 그 기준은 이러한 가치에 따라서 평가하였다. 이러한 음악의 가치 평가는 오늘날 여전히 청소년ㆍ소녀들에게 유해한 음악이라는 등 판단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종교 음악은 신을 찬미하는 도구로써 경전의 말씀을 전하거나 예배의 엄숙함과 신성한 분위기를 만드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종교에서 음악의 가치는 신성한 영적 체험에 있었다.
또 다른 음악의 가치는 20세기 문명과 함께 태어난다. 대량 생산으로 찍어낸 복제된 음악, 즉 상품의 가치로 평가되는 음악 말이다. 산업에서 음악의 가치는 궁극적으로 이득이 목적이 된다. 그래서 예술성과 무관하게 상업성을 위해 만들어지기도 한다. 물론 순수한 창작 행위 그 자체를 높이 평가하는 예술 음악(Fine art)도 있다. 그래서 소위 예술 음악은 대중과 거리 두고 작품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클래식 음악의 역사에서 20세기에, 미래지향의 새로운 음악을 추구했던 모더니즘 클래식 음악과 과거지향의 대중적인 고전 음악이라는 이분법적 흐름을 낳았던 이유가 '예술'에 대한 가치 평가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 개인의 꿈이나 이상 실현이나 시대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음악의 가치도 있다.
가령, 바흐에게 음악의 가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수단, 즉 종교적 신념과 함께 더욱 빛을 발했고, 음악을 통해 민족의 단결과 외세에 저항했던 베르디ㆍ시벨리우스ㆍ그리그에게 음악의 가치는 정치적 신념을 통해 드러나기도 하였다.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리스트, 바그너, 베르디, 말러 등등 클래식 음악가들이 그랬고, 대중음악가들이 추구하는 음악의 가치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럼 우리에게 필요한 음악의 가치는 무엇일까?
그것은 음악의 정서적 가치라 생각한다. 음악이 누군가에게는 교육이나 교화의 가치로서, 상품의 가치로서, 예술의 가치로서, 그리고 사적인 가치로 평가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음악의 이런 가치 평가는 음악에 대한 공감을 얻기엔 부족함이 있다. 왜냐하면, 음악을 듣는 '나'의 존재가 빠진 가치 평가, 즉 음악을 통해 느끼는 나의 정서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는 음악에 관해 이야기할 때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얼마의 돈을 벌었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적어도 선율이나 리듬, 노랫말을 통해 느끼는 아름다움이나 즐거움과 같은 음악의 정서적 이야기를 할 때 공감한다. 그래서 다양한 음악을 들을 때 느끼는 정서는 70억 인구만큼 다양하고 풍부해진다. 이것이 음악의 정서적 가치다.
마찬가지로 2013년 식지 않은 '힐링'의 사회적 현상 역시 사랑ㆍ자비ㆍ행복ㆍ기쁨ㆍ활력ㆍ나눔ㆍ공감ㆍ소통과 같은 음악의 수많은 정서적 가치 중 하나다. 그러니까 힐링은 지금 당면해 있는 여러 문제로 인한 우리의 정서적 결핍을 '바로잡기' 위한 사회적 현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힐링을 포함한 그 밖의 정서적 표현은 그 시대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힐링'을 넘어 '행복'의 단어가 넘쳐나는 시대가 왔으면 한다. 더욱이 음악을 통해 행복이라는 사회적 정서가 만들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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