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복 극작가·대전교원시니어클럽 정책실장 |
서양화에 익숙해진 우리는 '먼 데 있는 것을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가깝게 그리다니 이게 무슨 그림이야'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가까운 곳에 있는 물체를 크거나 넓게 그리고 먼 곳에 있는 물체는 작거나 좁게 그리는 서양화의 이론만을 학교에서 배운 이유에서다.
때문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만 가지고 대상을 판단한다.
하지만, 세상을 살면서 어찌 눈에 보이고 귀에 듣는 것만 가지고 판단할 수 있겠는가. 현재의 삶이 아무리 고단하고 힘들어도 멀리 보이는 미래는 좀 더 희망 있는 미래, 밝은 미래를 마음으로 느끼고 갈망했기에 역원근법의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귀에 들리는 것만 갖고 세상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향후 수십 년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좌절하지 않는 강한 의지와 꾸준한 실천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사상가인 알베르 카뮈는 인간의 삶을 '시지프스 신화'에 비유했다.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인 시지프스는 산 밑자락에서부터 산꼭대기까지 무거운 돌을 올려야만 하는 운명을 지닌 존재다. 그는 온갖 노력을 기울여 돌을 산 정상까지 간신히 굴려 올린다. 하지만, 그가 힘들여 올린 돌은 정상에 다다르자마자 다시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돌은 결코 산 위에 올려진 채 고정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시지프스는 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 다시 돌을 올리고자 애를 쓴다.
물론, 결과는 마찬가지다. 돌은 다시 굴러 떨어지고 시지프스는 다시 돌을 올리기 위해 산 밑으로 내려가야만 한다.
산 정상에 돌을 올려놓으려는 그의 소망은 달성되지 않는다. 시지프스의 노력은 항상 무위(無爲)로 돌아간다.
여기서 우리는 시지프스의 노력을 헛된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카뮈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허무와 좌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시지프스의 운명을 통해서 인간의 삶에 가로놓인 참된 진실을 역설하고자 했다.
연암 박지원의 초정집서(楚亭集序)에도 역경을 이겨내는 삶의 지혜가 나온다.
연경(燕京ㆍ베이징의 옛 이름)에 있는 황제를 만나기 위해 중원 땅을 가로지르며 온갖 역경을 헤쳐나갈 때 '썩은 흙에서 영지(靈芝)가 생겨나고, 썩은 풀에서 반딧불이 생겨난다는 것을 터득했다.
몇날 며칠을 가고 다시 열흘이 지나도록 산이 보이지 않는 요동 벌판. 그 드넓은 허허벌판에서도 박지원은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삶의 희망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고난을 고난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물론, 왕으로부터 동지상사 수행원의 명을 받아 황제를 알현하러 가는 길이었지만, 현실 자체는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을 것이다. 썩은 흙과 썩은 풀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현실의 고통이다. 거기서 생겨나는 '영지와 반딧불이'는 고통을 참고 이겨낸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는 진리다.
이처럼 삶의 지혜는 선인들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다시 우리를 통해 후손들에게 이어진다.
오늘날 과학의 발달 덕분에 물질은 풍부해졌으며, 외적인 삶은 편리해졌다.
하지만, 인간의 내면은 끝없는 좌절과 허무가 계속되고 있다. 아무리 경제적인 논리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하지만, 괴로워하고 좌절할 필요가 있겠는가.
현재의 삶이 아무리 고단하고 힘들어도 멀리 보이는 미래는 좀 더 희망차고 밝은 미래를 마음으로 느끼고 갈망했던 조상처럼, 힘들여 올린 돌이 다시 산 밑으로 떨어져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시작하는 시지프스처럼, 썩은 흙에서 영지(靈芝)가 생겨나고, 썩은 풀에서 반딧불이 생겨난다는 것을 터득한 연암처럼, 어떠한 난관에도 포기하지 않는 굳건한 의지로 현실의 고난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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