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국원 침례신학대 총장 |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문자를 발명하고 기록(記錄)하기 시작한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불확실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기억을 보완할 수 있는 놀라운 발명품이 문자였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 이집트의 파피루스, 중국의 죽편(竹片), 중세의 양피지 같은 육중하고 번거로운 물건들이 요즘의 앙증맞고 경이로운 USB 메모리장치 보다 더 놀랍고 유용한 기억보조장치였는지 모른다.
우리의 삶은 그처럼 기억되고 기록되어 간다. 개인의 모든 인상과 사건들은 자동적으로 기억되지만 곧 퇴색하기 시작하고, 개인의 삶이 다하면 마치 전원이 꺼질 때 모든 RAM 메모리가 사라지는 컴퓨터처럼 개인의 기억도 소멸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기록은 남아있다. 개인의 기록과 사회의 기록과 국가의 기록이 남아서 역사가 된다. 역사는 곧 기록이다. 그래서 문자가 발명되어 기록이 시작되기 전의 시간을 아예 선사(先史, pre-history)시대라고까지 부르지 않는가?
역사학 수업 첫 시간에 늘 듣게 되는 말은 첫째, 실제 사람들이 살았던 삶으로서의 역사, 그리고 둘째, 그 실제 삶에 대한 기록으로서의 역사, 두 가지 의미를 구분하라는 당부이다. 보통 사람들은 흔히 생생한 삶으로서의 역사에 더 친밀감을 나타내지만 정작 학자들은 기록된 사건으로서의 역사에 더욱 관심을 가진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카(E.H. Carr)의 유명한 말도 바로 현재 관점에서 재해석되고 기록되는 역사의 의미를 지적하는 것이다.
최근 들어 이 '역사'에 대한 소문이 심상치 않다. 우리나라 현대사에 대한 논란이 과열되면서 전혀 상반되는 두 입장이 학계를 양분하고 있는 것 같다. 예전에 '역사'는 신성한 것으로 여겨져서 가령 '역사의 심판'이라는 말은 무소불위의 독재자마저 두렵게 만드는 마법을 지녔었다. “세계 역사는 곧 세계 법정이다 (Die Weltgeschi chte ist das Weltgericht)”라는 헤겔의 말은 또 얼마나 열혈청년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던 명언이었던가?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 현대사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진흙탕 논쟁은 '역사'에 대한 마지막 존경심도 다 고갈시키고 있는 것 같다. 모든 가치가 상대적임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정신에 맞추어 지식이 힘이라는 말보다 힘 곧 권력이 지식을 만든다(power/knowledge)는 역설적 명제는 나름 이해할 만하다. 그렇지만 역사학자에 따라, 아니 각급 교사에 따라, 아니 그 해 선출된 교육감에 따라, 한국 전쟁이 남침이 되었다가 북침이 되었다 하는 이 엄청난 혼란을 학생들에게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더욱 답답한 현실은 아직 기억이 분명한 당사자들이 생존하고 있는 사건에 대해서도 그 기억의 기록에 대한 공방이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현재 정계를 달구고 있는 NLL 논란은 이 문제에 관련된 분들의 기억과 기록이 충돌하기 때문에 빚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불협화음이 계속되고 있는 이 문제가 과연 언제 어떻게 대한민국의 정통 '역사'로 정립될 수 있을지 동시대를 살고 있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우리나라 현대사에 관한 이런 논란이 도저히 해결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던지, 혹은 아예 역사에 대한 관심을 끊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던지, 서울대학교는 내년부터 국사과목을 수능시험 선택에서 제외한다고 발표했다. 선조들의 기록된 역사를 학생들이 더 이상 기억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아 민망하기 그지없다. “우리는 역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함을 역사로부터 배운다!” 헤겔의 경고가 새삼 섬뜩하게 생각나는 더운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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