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치영 스피치아카데미 대표 |
마침내 소크라테스는 젊은이의 손을 입으로 가져가 거침없이 쏟아지던 젊은이의 입을 막았다.
소크라테스는 “여보게 젊은이. 자네에게는 수업료를 두 배로 받아야 할 것 같네”라고 말했다. 그러자 젊은이는 불평을 쏟아냈다.
“수업료가 두 배라고요? 대체 왜 그런 거죠.”
소크라테스는 그 이유를 이렇게 답했다.
“왜냐하면, 말일세, 자네를 훌륭한 지도자로 만들려면 자네에게 두 가지 원리를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네. 첫째는 혀를 자제하는 법을 배워야만 하네. 그리고 나서야 혀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걸세.”
필자는 '말하는 법'을 연구하고 강의하는 '화술전문가'다. 많은 이들이 말을 잘하려고 필자를 찾아오지만 '말 잘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잘 듣는 법'이다. 유창하게 말하는 것보다 잘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 사실을 아무리 강조해도 실감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필자는 '사람을 대할 때 가르치려 하지 마라. 다만, 진심으로 함께하는 마음이면 절로 통한다. 세상이 혼란스러운 것은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없는데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고수는 말을 아낄 줄 안다. 경청하는 것이 바로 훌륭한 지도자가 배우는 방법이다.
경청의 가장 낮은 수준을 이르는 '배우자 경청'이란 용어가 있다. TV를 보면서 건성으로 듣는 것이다. '좀 조용히 해봐', '있다가 얘기해' 하는 식의 경청이 바로 배우자 경청이다. 가까운 사람의 말을 얼마나 안 듣길래 이런 용어가 생겨났을까. 듣는 것(hearing)과 경청(listening)은 다르다. 듣는 것은 소리라는 음파가 속귀의 귀청을 울리는 물리적 현산인 반면, 경청은 상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받아들여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경청은 소리를 감지하는 물리적 귀가 아니라, 감정을 알아차리는 마음의 귀를 갖는다는 의미다. 경청은 상대방을 인간적으로 존중하는 마음에서 출발해야 한다.
경청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 적극적 경청은 상대가 말하는 낱말 그대로의 의미만을 수동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이 왜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일까'라며 적극적으로 이해하는 자세로 듣는 것을 말한다.
둘째, 반사적 경청은 적극적 경청의 하나로 상대가 화났거나 감정이 끓어오를 때 평가나 편견을 가하지 않고, 겨울에 비치듯이 되돌려 줌으로써 상대의 감정을 내가 이해하고 있음을 전하는 것을 말한다.
셋째, 공감적 경청은 경험의 최고 단계로 감정이입적 경청이다.
말하는 것을 피상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왜 이런 말을 하고 있으며 그 안에 깔려 있는 느낌과 생각은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도록 상대방의 처지에서 주의를 끝까지 집중해 그의 말을 듣는 것을 말한다. 진정한 대화를 위해서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으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시선이나 자세를 상대 쪽으로 향한다. 시선을 외면하거나 뒤로 젖혀진 자세는 상대에게 거부감과 무시당하고 있다는 기분을 줄 수 있다.
처지를 바꾸어 본다. 사람마다 성장배경과 처지가 다르므로 자신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상대방의 처지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
의문점이 있으면 질문한다. 지레짐작으로 넘어가지 말고, 확실하게 파악하려고 노력한다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야 자기 말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상대가 알고, 공감수준도 넓어진다.
선입관과 편견에서 벗어난다. 상대의 과거, 전해 들은 말, 신체적 특성 등에 의한 선입관을 가지지 말고 지금 현재의 상대를 보려고 노력한다.
결점과 문제점보다 감춰진 장점, 잠재력을 찾으며 듣는다. 공감을 잘하고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은 상대방의 감춰진 장점을 찾는 능력이 뛰어나다.
표현된 말보다는 비언어적인 제스쳐에 귀를 기울인다.
말의 내용보다는 목소리의 강약과 떨림, 시선, 제스쳐, 억양, 자세 등에 보다 많은 내면적 정보가 실리므로 집중한다. 필자가 추천하는 가장 좋은 경청은 중요한 대목은 메모하면서 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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