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인구 계룡건설 명예회장 |
필자도 이때 학도병(미성년인 17세)으로 지원 입대하여 이등병으로 영천전투에 참여한 바 있다.
영구불세출의 명장 맥아더는 고착된 낙동강 전선을 그대로 두고 직접 진두지휘하여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하여 4일 만에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괴뢰군의 보급로와 퇴로를 차단함으로써 삽시에 낙동강 전선은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되고 괴뢰군은 전투제대를 해산하여 각개 태백산맥을 통하여 후퇴명령을 내렸다. 이때 수만명의 투항포로가 생겼다.
미군과 한국군 그리고 파병연합군은 38선까지만 진격탈환하고 1개월간을 대기하였다. 드디어 38선을 넘어서 압록강, 두만강까지 진격하여 괴뢰군을 무장해제 하라는 결정이 UN과 미국에서 결정되었다. 그날이 1950년 10월 1일이고 지금 대한민국 국군의 날이 바로 그날을 기념하는 날인 것이다. 노도와 같이 진격한 UN군은 4일 만에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잔병소탕에 이르렀을 때 스탈린의 사주와 마오쩌둥의 지시로 100만 중공군이 인해 전술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참전하게 되고 한국전은 새로운 국제전으로 이어간다.
1950년말 함흥 대철수 작전, 1951년 1월 4일 수도 서울 철수 작전의 고배를 맞이하며 UN군은 보강하여 평택-원주-강릉을 사수하자는 '노벰버 라인'을 구축하고 막강한 양적우세(공군력+해군력)로 현 휴전선까지 확보하게 되며, 이때 대한민국의 강한 반발을 무릅쓰고 1953년 7월 27일을 기하여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지금에 이른 것이다. 이 3년여의 한국전쟁에 희생된 병력은 한국군 62만 8300여명, 미군 13만 7250명, 16개 참전국 1만 7222명 합계 78만 2772명에 이르며 이는 2차 세계대전의 연합군 인명피해보다 많은 것이다. 당시 전 세계 UN 등록된 국가는 93개국이었는데 그 중 6·25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우리를 지원한 나라는 68개국(62%)이나 된다.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발생한 민간 한국인 희생자와 이산가족은 무려 300만이 넘는다.
한국전쟁을 통해 전사한 워커 8군사령관(중장), 포로가 된 딘 24사단장(소장)을 비롯 중상자 장군 등 장군급 인명피해가 5명에 이르며, 미국 전역에 있는 장성급 아들이 자진하여 참전한 장교가 135명이고 그 중 전사한 장교가 35명에 이른다. 한국전을 총지휘하던 벤프리트 대장의 아들, 또 극동군 총사령관을 하던 크라크 대장 아들도 한국전에서 산화했다. 미국 육군 원수이며 미국 대통령을 지낸 아이젠하워의 아들, 포로가 된 딘 장군의 아들도 한국전 전선에서 싸웠다. 미국 전시 종군기자로 전선소식을 보도한 민간인 기자 중 최전방에서 순직(전사)한 보도원이 29명에 이른다.
6·25전쟁이 어찌 동족상쟁의 전쟁이란 말인가? 미국 워싱턴에 있는 한국전쟁 기념공원에 새겨진 기념문은 '자유는 공짜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주문(主文)과 '우리 미합중국은 조국의 부름을 받고 생면부지의 나라, 일면식도 없는 이들의 자유를 지켜주기 위하여 분연히 나서 싸웠던 자랑스러운 우리의 아들딸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는 설명이 새겨져 있다.
최근 미국방성의 한국전쟁 자료실의 명칭 또한 '잊혀진 한국전쟁의 자료실'이었던 것을 '승리한 한국전쟁 자료실'로 바꾸었다. 명칭을 바꾼 사연이 써있는데 '한국전은 한국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싸운 전쟁이다. 비록 정전상태를 지금까지 유지해 오면서 한국은 세계 모범적인 자유법치국가로 변했고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발전했다. 그래서 승리한 전쟁이다'.
오늘날 전후세대의 젊은이들에게 꼭 한번 호소하고 싶은 심경에서 노병은 그때 체험담을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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