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난순 교열부장 |
보문산에는 나만의 작은 숲길을 갖고 있다. 그 오솔길은 인적이 드물어 대자연의 숨소리를 오롯이 느끼게 해준다. 소나무, 참나무 등 여러 종류의 나무와 풀들이 무성한 숲을 이루며, 진한 솔향과 땅에 쌓인 낙엽의 눅눅한 냄새는 내 코를 벌름거리게 한다. 바람에 부딪혀 나뭇잎들이 비벼대는 소리와 뻐꾸기 울음은 산책자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시인 정현종은 '올해도 뻐꾸기는 날아왔다'에서 “네 소리의 경전(經典)에 비하면 다른 경전들은 많이 불순하다”고 자연을 찬미했다.
한여름 비오는 날의 보문산은 또 어떤가. 비오는 날은 숲을 걷기에 가장 좋은 날이다. 대지는 다시 태어난 듯하고 축축하게 젖어 있는 숲은 생명의 숨결을 세차게 내뿜는다. 특히 망향탑 고갯길에서 사정공원 못미쳐 과례정까지의 숲길은 압권이다. 장대비가 그친 후 물기를 머금은 키큰 벚나무와 단풍나무가 하늘을 가린 숲길은 신비롭다. 어두컴컴한 터널같은 길은 뿌연 안개가 숨바꼭질하듯 나무사이를 뱀처럼 휘감아돌며 숲의 정령을 깨운다. 'S'자로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이 길은 마법에 이끌려 무섭지만 계속 가지 않고는 견딜수 없는, 어떤 유혹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 5월말 대전시가 우려할 만한 계획을 발표했다. '보문산권 종합관광개발 계획'이 그것이다. 낙후된 보문산을 권역별로 6개공원을 조성한다는 것인데 면면을 살펴보면 생태계 훼손은 불을 보듯 뻔하다. 환경단체는 보문산 일대는 많은 편익시설이 있는데 더 이상의 개발은 생태계와 자연경관을 훼손시킨다고 반대의견을 내놓았다. 며칠전 염홍철 시장은 문제점이 지적됐다며 기본계획은 살리되 사업을 대폭 축소하겠다고 했다. 정답은 축소가 아니라 백지화다.
현재 보문산 입구에는 국민의 혈세를 퍼부은 아쿠아월드가 폐장된 채 쓰레기만 나뒹구는 흉물로 방치돼 있다. 거액을 들여 수입한 희귀물고기는 폐사했고 상가 입주민들은 큰 손실을 보고 철수한 상태다. 4대강 사업 역시 이명박 정부가 20조원을 들여 보를 설치했지만 물이 썩고 생태계가 파괴되는 등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가장 반 경제적이고 반 생태적인 토건시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우리는 자연을 외경의 대상이 아니라 지배와 분석의 상대로 낮춰보고 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서구의 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의 자연지배를 당연시하는 믿음으로 귀결됐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에 사로잡힌 지금 우리에게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은 새겨들을 만한 가르침이 된다. 노자는 자연을 흐트러지게 하는 '인위' 즉, 인간의 욕망이나 사리사욕을 인정했다. 다만 거기에 대한 한계를 설정해 이 '인위'가 자연을 해치지 않도록 억제하면서 사는 것이 '무위자연'이라는 것이다.
보문산은 대전시민들의 휴식처이자 허파역할을 하는 곳이다. 그리고 동물들의 삶의 터전이다. 거기서 짐승도, 나무도, 사람도, 모두 같이 공기를 마시고 산다. 도심 한복판에 넓고 완만하고 온갖 나무와 동물이 어울려 살고, 인간이 쉴수 있는 녹지공간이 있다는 건 큰 축복이다. 그런데 아쿠아월드도 모자라 보문산을 또 건드리겠다고? 프로이트는 『문명과 불만』에서 인간이 문명사회에 살수록 불만은 커진다고 지적했다. 인간이 자연을 등지고 문명에만 기대 살 때 질병을 가져올 수 있다는 얘기다. 나는 대전시민들이 기계음과 온기없는 콘크리트 건물에서 휴식을 취하고 싶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나는 대전시민들이 나무가 잘려나가고 산이 파헤쳐지고 다람쥐, 뻐꾸기, 민달팽이, 개구리, 토끼가 쫓겨나는 걸 원치 않는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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