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용기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박사 |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이전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의 많은 나라는 복잡한 도량형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도량형제도는 상거래나 일상생활을 불편하게 할 뿐만 아니라, 땅을 소유하고 있었던 귀족들이 소작으로 살아가는 많은 농민과 서민들로부터 부당하게 소작료나 세금을 거두어들이는데 유리한 도구로 사용됨으로써 불평등의 상징이 돼 있었다.
이때문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평민들은 도량형의 개혁 또한 요구하게 됐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도량형 제도야 말로 그들이 원하는 '평등'한 사회의 초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편 프랑스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한 과학자들 역시 과학 발전을 위해서는 통일되고 정확한 측정 단위와 방법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프랑스 혁명은 이러한 그들의 생각을 실현시키기에 적절한 기회를 제공했다.
프랑스 아카데미가 추진한 새로운 도량형의 두 가지 큰 줄기는 '자연으로부터 오는 표준'과 '십진법'이었다. 길이에 대한 표준으로 여러 가지가 제안됐지만, 도량형 개혁 위원회에서는 파리를 지나는 지구 사분 자오선 (북극에서부터 적도까지의 길이)의 1000만 분의 1을 기본 단위로 하기로 결정했다. 길이 단위의 명칭은 '척도'를 뜻하는 그리스어인 '메트론'에서 따온 '미터'로 하기로 했다. 이들은 새로운 도량형 제도를 만들면서 “모든 시대를 위해, 모든 사람을 위해”라는 정신을 공유하였으며 이러한 이념은 혁명을 주도한 시민들에게도 호응을 얻기에 충분했다. 우여곡절을 거쳐 1875년 5월 20일 프랑스, 미국 등을 포함한 17개국이 국제미터협약을 체결하게 됐고 1884년에는 백금과 이리듐이라는 금속의 합금으로 미터와 킬로그램 원기가 제작된다. 1889년 9월에 열린 국제도량형총회에서 국제표준으로 승인을 받아 각 회원국에 원기가 제공됨으로써 미터법이 세계적인 도량형의 표준이 되었다. 그 후 과학자들은 보다 정확하고 보편적인 미터표준을 정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현재는 1 m를 '빛이 진공 중에서 299,792,458분의 1초 동안 진행한 경로의 길이'로 정의해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미터원기(번호 10 )가 1894년 조선 고종 31년에 들어왔으며 국제미터협약에는 1959년에 가입했고 미터법을 공식적으로 실시하게 된 것은 1964년이다.
비록 국제 미터협약에 가입하고 미터법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프랑스에 비해 늦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프랑스가 혁명을 통하여 혼란했던 도량형제도를 정비하기 시작한 것보다 300여 년 전부터 도량형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조선 중종 4년 (1509년)부터 암행어사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는데, 암행어사들은 유척(鍮尺)이라는 놋쇠로 만든 기준자를 들고 다녔던 것이다. 암행어사는 파견될 군현의 이름이 적힌 임명장과 같은 봉서(封書)와 암행어사의 직무를 적어놓은 사목(事目), 역마와 역졸을 이용할 수 있는 증명인 마패와 함께 유척을 받았다고 한다. 유척은 놋쇠로 만든 자로 올바른 도량형이 사용되는 지를 감찰해 지방 수령들이 서민들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세금이 공정한 지를 점검하는데 쓰였다. 또 형벌에 사용하는 도구의 크기가 규정에 맞는지 알아보는 용도로도 쓰였다고 한다. 유럽의 경우 바른 도량형이 평등과 보편성 및 정확성을 확보하기 위해 평민들의 요구에 의해 발전하게 됐다면, 우리나라의 경우 유척은 주로 관청의 공정성 확보를 위해 중앙정부에 의해 만들어지고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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