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구 큐레이터 |
놀랍도록 사실적 모습을 보여주는 그리스 조각은 이상적인 인간의 신체를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한 그리스 고전기의 조각가 폴리클레이토스는 인체비례에 관한 연구를 통해 『카논(Canon)』이라는 책을 쓰기도 해 '비례의 입법자'라고 불렸다. 과학(수학)이 예술과 만난 것이다. 그 이전에도, 만물의 근원을 수(數)로 보았던 피타고라스는 음 사이의 수적 비례를 찾아냈을 뿐 아니라, 별의 운행에도 이를 적용하여 우주가 아름다운 음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과학과 예술은 고대로부터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고 바람직한 삶을 추구하는 정신활동의 두 축이었다.
미술에 국한해 보더라도, 과학과 미술은 끊임없이 서로를 자극하고 영향을 주어왔다. 인간의 이성이 복권된 르네상스시대의 대표적인 미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사물에 대한 명확한 지식과 이해를 통해 그 안에 깃든 신의 섭리를 알고자 하였다. 무수한 과학적 발명품을 남기기도 한 그는 '화가'보다는 '학자'로 불리기 원했던, 그러니까 미술을 학문으로 보았던 진정한 르네상스인이었다.
수학적인 원근법의 원리와 카메라 옵스큐라는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고자 했던 근대 이전 회화의 기법적 완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인쇄술과 석판화 기술에서 진전된 사진술의 발명은 회화로 하여금 세계를 재현해내는 역할, 그러니까 '세계와의 관계 맺기'를 사진에게 넘겨주고, 내적 원리와 존재근거를 찾아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도록 함으로써 모더니즘 미술, 즉 현대미술을 만들어내었다. 사진은 또한 영화로 발전하여 인간의 문화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이러한 일들은 이성에 기반을 둔 과학과 예술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미술이 서로에게 지속적으로 영향과 영감을 주고받은 무수한 사례의 몇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적인 비디오예술가로 우리가 자랑스러워마지않는 백남준 역시, 전자기술의 발달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 역시 미술과 과학의 결합을 통해 태어난 것이다.
여러 해 전부터 대전에서는 과학도시라는 특성을 살린 미술과 과학의 결합이 이야기되고 또 시도되고 있다. 그러한 시도는 미디어아트 전시와 같은 기본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왔으며, 최근에는 미술가들과 연구단지의 과학자를 연결하여 미술가들이 작품을 실현하는데 도움을 주는 형식으로 진행되기도 하고 있다.
미술과 과학이 만나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과학자는 과학자대로, 미술가는 미술가대로 먼저 각자의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사색, 나아가 철학과 신념이 필요하다. 원리나 기술적 문제를 해결해주는 정도는 진정한 과학과 미술의 만남이라 할 수 없다. 무엇보다 과학과 미술의 결합이라는 문제에서 그것이 자신의 작품에서 의미하는 바, 즉 작품세계에 대해 진지한 접근이 전제된 작가가 필요하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연구하는 바가 인간이나 사회에 주는 의미나 가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예술과의 결합을 통한 연구 성과 자체는 물론 그것이 내포한 또 다른 가치 역시 성찰할 수 있는 과학자가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미술인과 과학자의 자발적인 의사와 가치의 공유가 전제되고, 대전이라는 공동체가 그를 위한 터전을 만들어줄 수 있을 때, 비로소 그러한 일들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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