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이]지금은 다시 문맹퇴치운동이 거세게 일어날 때

  • 오피니언
  • 사외칼럼

[이승이]지금은 다시 문맹퇴치운동이 거세게 일어날 때

이승이 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 승인 2013-06-18 14:26
  • 신문게재 2013-06-19 21면
  • 이승이 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이승이 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우리 부부에게는 어린이가 없다./ 그렇게도 소중한/ 어린이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난/ 동네 어린이들을 좋아하고/ 사랑한다./ 요놈! 요놈하면서/ 내가 부르면/ 어린이들은/ 환갑 나이의 날 보고/ 요놈! 요놈한다.// 어린이들은/ 보면 볼수록 좋다./ 잘 커서 큰일 해다오!” 천상병 시인의 '난 어린애가 좋다'라는 시다. 몇 해 전 대학 교양 강의에서 이 시에 대해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요?”하고 물었더니, 한 학생이 정색을 하며 “어른에게 욕하는 나쁜 어린이에 대한 경고입니다”라고 답했다. 순간 강의실은 웃음바다가 됐지만 시쳇말로 '멘붕'이 아닐 수 없었다.

'난 어린애가 좋다'는 어린이가 없는 화자의 어린이를 좋아하는 마음이 잘 드러난 시다. 그 학생의 오독(誤讀)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당시에는 단순히 독서량 부족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와 같은 학생들은 날이 갈수록 늘었다. 강의 곳곳에 “알아듣겠어요?”, “무슨 말인 줄 알겠어요?”, “이해가 돼요?”와 같은 내용 이해 상태를 확인하는 질문 아닌 질문이 수도 없이 반복됐다. 그 뿐만 아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도입부 설명만으로 강의 시간 끝나기가 부지기수였다. 강의는 점점 지지부진해졌고, 학생들과의 알 수 없는 불통은 계속됐다. 속앓이는 시작됐고, 한참 뒤 많은 학생들이 읽기 장애를 가진 '읽기 부진아'라는 것을 알고서야 납득됐다. 글을 읽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들, 기능적 문맹자가 강의실에 넘쳐나는 것이 오늘날 문맹 현실이었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문맹률이 가장 낮다. 문해(文解)율이 99.8%에 달한다고 하니 문맹(文盲)률은 0.2%에 불과한 셈이다. 광복 직후 국민 10명 중 8명이 문맹이었던 것을 살피면 0.2%의 문맹률은 가히 놀랄만하다. 이는 광복 직후 대대적으로 벌어진 문맹퇴치운동과 한국 부모의 무학(無學)에 대한 보상심리가 만들어낸 뜨거운 교육열이 큰 몫을 했으리라. 그러나 0.2%의 문맹률에도 불구하고 한국교육개발원(KEDI)이 발간한 '2004 한국 교육인적 자원 지표'에 따르면, 의약품 복용 설명서 같은 생활정보 등 일상생활을 영위케 하는 1단계 문서해독 수준은 전체의 38%나 되며, 선진사회의 복잡한 일상에 대처할 수 있는 3단계 문서해독 수준은 고작 21.9%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보고 듣는 데는 어려움이 없으나 해독(解讀)은 불가능한 난독(難讀) 상태에 빠진 실질 문맹률은 광복 직후나 별반 차이가 없음을 뜻한다.

문맹률은 낮은데 실질 문맹률은 왜 높을까?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원인은 뜻밖에 쉽사리 찾아진다. 학생들은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나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척척 해독하면서 '난 어린애가 좋다'는 오독한다. 어려운 문제는 푸는데 쉬운 문제는 풀지 못하니, 재주는 좋은 듯하나 선뜻 이해는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려운 문제를 푼다는 것은 문서해독 수준이 높다는 것이고, 문서해독 수준이 높다는 것은 실질 문맹률이 낮음을 의미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원인은 딱 한 가지다. 정답을 외워서 쓰는 것을 유도하는 평가를 위한 독서를 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진달래꽃」이나 「님의 침묵」은 읽은 것이 아니며 「난 어린애가 좋다」는 읽을 수 없는 것이다.

집집마다 학교마다 사회마다 '글로벌 인재 양성 프로젝트'에 매진하고 있다. 어불성설이다. 적어도 '학교 속의 문맹자들'(엄훈의 책 제목이기도 함)이 '학교 밖의 문맹자'로 이어지면서 낳을 더 큰 문제를 조금이라도 감지한다면 말이다.

지금은 다시 문맹퇴치운동이 거세게 일어날 때다. 학교 밖의 문맹자들이 마주 대하는 대상은 정지된 문자책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자연과 인간이다.

자연과 인간은 변화무쌍하다. 보고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블랙아웃(blackout)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의식을 깨우쳐 합리적인 판단력을 기르는 일체의 운동'으로써 문맹퇴치운동만이 오늘날 문맹 현실에서 벗어나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 보시게 젊은이, 검은 것은 글자요 흰 것은 종이가 아닐세. 글자를 보지 말고 제발 읽으시게!”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유성 둔곡 A4블록 공공주택 연말 첫삽 뜨나
  2. 12월부터 5인승 이상 자동차 소화기 설치 의무화
  3. [기고] 공무원의 첫발 100일, 조직문화 속에서 배우고 성장하며
  4. ‘우크라이나에 군사지원·전쟁개입 하지 말라’
  5. JMS 정명석 성범죄 피해자들 손해배상 민사소송 시작
  1. 대전보건대, 대학연합 뉴트로 스포츠 경진·비만해결 풋살대회 성료
  2. 대전 유통업계, 크리스마스 대목 잡아라... 트리와 대대적 마케팅으로 분주
  3. 한국자유총연맹 산내동위원회, '사랑의 반찬 나눔' 온정 전해
  4. 구본길에 박상원까지! 파리 펜싱 영웅들 다모였다! 대전서 열린 전국 펜싱대회
  5. 대전시, 여의도에 배수진... 국비확보 총력

헤드라인 뉴스


"뜨끈한 한 끼에 마음도 녹아"… 함께 온기 나누는 사람들

"뜨끈한 한 끼에 마음도 녹아"… 함께 온기 나누는 사람들

27일 낮 12시께 눈발까지 흩날리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대전 중구 한 교회의 식당은 뜨끈한 된장국에 훈훈한 공기가 감돌았다. 식당 안에서는 대전자원봉사연합회 소속 자원봉사자들이 부지런히 음식을 나르며 어르신들을 대접하고 있었다. 150여 명의 어르신이 빼곡히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기다렸다. 얇은 패딩과 목도리 차림인 어르신들은 강한 바람을 뚫고 이곳까지 왔다고 한다. "밥도 같이 먹어야 맛있지." 한 어르신이 식당에 들어서자 자원봉사자가 빈자리로 안내했다. 이곳에 오는 대부분은 75세 이상의 독거 노인이다. 매일 혼..

"홈 승리하고 1부 간다"… 충남아산FC 28일 승강전 홈경기
"홈 승리하고 1부 간다"… 충남아산FC 28일 승강전 홈경기

창단 후 첫 K리그1 승격에 도전하는 충남아산FC가 승강전 홈경기를 앞두고 관심이 뜨거워 지고 있다. 충남아산FC는 28일 대구FC와 승강전 첫 경기를 천안종합운동장에서 홈 경기로 치른다. 홈 경기장인 아산 이순신종합운동장 잔디 교체 공사로 인해 임시 경기장으로 천안에서 경기를 하게 됐다. 승강전은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28일 홈 경기 사흘 후인 12월 1일 대구로 이동해 어웨이 경기를 치른다. 승리수·합산 득실차 순으로 최종 승격팀을 정하게 되며 원정 다득점 규정은 적용하지 않아 1·2차전 결과에 따라 연장전 또는 승부차기까지..

충청권 4개시도 "2027 하계U대회 반드시 성공"… 제2차 위원총회
충청권 4개시도 "2027 하계U대회 반드시 성공"… 제2차 위원총회

충청권 4개 시도가 2027년 열리는 하걔세계대학경기대회 성공 개최를 재차 다짐했다. 2027 충청권 하계세계대학경기대회 조직위원회(위원장 강창희, 이하 조직위)는 27일 대전 호텔 ICC 크리스탈볼룸에서 2024년 제2차 위원총회를 개최했다. 이날 총회는 지난 3월 강 위원장이 조직위원장으로 취임한 이후 처음 개최된 것이다. 행사에는 대전시 세종시 충남도 충북도 등 충청권 4개 시도 부지사와 대한체육회 부회장, 대한대학스포츠위원회 위원장, 시도 체육회장, 시도의회 의장 등이 참석했다. 강 위원장과 조직위원회 위원이 공식적으로 첫..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거리 나설 준비 마친 구세군 자선냄비 거리 나설 준비 마친 구세군 자선냄비

  • 12월부터 5인승 이상 자동차 소화기 설치 의무화 12월부터 5인승 이상 자동차 소화기 설치 의무화

  • 첫 눈 맞으며 출근 첫 눈 맞으며 출근

  • 가을의 끝자락 ‘낙엽쌓인 도심’ 가을의 끝자락 ‘낙엽쌓인 도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