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어린애가 좋다'는 어린이가 없는 화자의 어린이를 좋아하는 마음이 잘 드러난 시다. 그 학생의 오독(誤讀)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당시에는 단순히 독서량 부족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와 같은 학생들은 날이 갈수록 늘었다. 강의 곳곳에 “알아듣겠어요?”, “무슨 말인 줄 알겠어요?”, “이해가 돼요?”와 같은 내용 이해 상태를 확인하는 질문 아닌 질문이 수도 없이 반복됐다. 그 뿐만 아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도입부 설명만으로 강의 시간 끝나기가 부지기수였다. 강의는 점점 지지부진해졌고, 학생들과의 알 수 없는 불통은 계속됐다. 속앓이는 시작됐고, 한참 뒤 많은 학생들이 읽기 장애를 가진 '읽기 부진아'라는 것을 알고서야 납득됐다. 글을 읽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들, 기능적 문맹자가 강의실에 넘쳐나는 것이 오늘날 문맹 현실이었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문맹률이 가장 낮다. 문해(文解)율이 99.8%에 달한다고 하니 문맹(文盲)률은 0.2%에 불과한 셈이다. 광복 직후 국민 10명 중 8명이 문맹이었던 것을 살피면 0.2%의 문맹률은 가히 놀랄만하다. 이는 광복 직후 대대적으로 벌어진 문맹퇴치운동과 한국 부모의 무학(無學)에 대한 보상심리가 만들어낸 뜨거운 교육열이 큰 몫을 했으리라. 그러나 0.2%의 문맹률에도 불구하고 한국교육개발원(KEDI)이 발간한 '2004 한국 교육인적 자원 지표'에 따르면, 의약품 복용 설명서 같은 생활정보 등 일상생활을 영위케 하는 1단계 문서해독 수준은 전체의 38%나 되며, 선진사회의 복잡한 일상에 대처할 수 있는 3단계 문서해독 수준은 고작 21.9%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보고 듣는 데는 어려움이 없으나 해독(解讀)은 불가능한 난독(難讀) 상태에 빠진 실질 문맹률은 광복 직후나 별반 차이가 없음을 뜻한다.
문맹률은 낮은데 실질 문맹률은 왜 높을까?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원인은 뜻밖에 쉽사리 찾아진다. 학생들은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나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척척 해독하면서 '난 어린애가 좋다'는 오독한다. 어려운 문제는 푸는데 쉬운 문제는 풀지 못하니, 재주는 좋은 듯하나 선뜻 이해는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려운 문제를 푼다는 것은 문서해독 수준이 높다는 것이고, 문서해독 수준이 높다는 것은 실질 문맹률이 낮음을 의미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원인은 딱 한 가지다. 정답을 외워서 쓰는 것을 유도하는 평가를 위한 독서를 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진달래꽃」이나 「님의 침묵」은 읽은 것이 아니며 「난 어린애가 좋다」는 읽을 수 없는 것이다.
집집마다 학교마다 사회마다 '글로벌 인재 양성 프로젝트'에 매진하고 있다. 어불성설이다. 적어도 '학교 속의 문맹자들'(엄훈의 책 제목이기도 함)이 '학교 밖의 문맹자'로 이어지면서 낳을 더 큰 문제를 조금이라도 감지한다면 말이다.
지금은 다시 문맹퇴치운동이 거세게 일어날 때다. 학교 밖의 문맹자들이 마주 대하는 대상은 정지된 문자책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자연과 인간이다.
자연과 인간은 변화무쌍하다. 보고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블랙아웃(blackout)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의식을 깨우쳐 합리적인 판단력을 기르는 일체의 운동'으로써 문맹퇴치운동만이 오늘날 문맹 현실에서 벗어나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 보시게 젊은이, 검은 것은 글자요 흰 것은 종이가 아닐세. 글자를 보지 말고 제발 읽으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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