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훈 대한성공회 대전교구 가정형 Wee센터 실장 |
10년 전 추석 명절날, 아이는 무릇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열공'해야 원하는 대학에 간다고 말하는 조카를 만났다. 당시 학습지나 학원관련 광고에는 '4학년 때부터 공부를 잡아야 한다'는 구호가 흔했다. 남들보다 앞서기 위한 선행학습의 열기가 뜨거웠다. 조카의 딸이 4학년이 되자 선행학습과 과외를 시키기 시작했고, 끊임없는 테스트를 치르며 학습 성취도를 점검받았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조카의 딸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조금씩 몸이 불기 시작했다. 고3이 되어서는 옛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비만이 되어 있었다. 학습 스트레스가 가장 큰 원인이었던 것 같다. 조카가 확고한 신념으로 믿었던 '4학년 때부터'라는 구호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4학년 때부터 열공해야 원하는 대학을 갈 수 있다고 했으니 그 목표가 원하는 '대학 입학'이 아니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다.
#2. 모방의 대상
고전기의 예술은 모방(미메시스)의 대상이 자연이었다. 자연은 예술적인 창작활동에서 그대로 따라야 할 최고의 모델이었다. 예술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활동으로 자연만한 아름다움을 가진 모델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배우는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을 가능한 실제 모습에 가깝게 따라하려고 한다. 맡은 배역과 한 마음 한 몸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배역이 그에게는 이상적인 모델이다.
부모들이 '4학년 때부터' 자녀에게 재현시키려 하는 모델은 어떤 인간상일까. 초등학교에서부터 우리의 부모들은 자녀의 교육을 위해 부부가 따로 사는 일도 개의치않을 정도로 적극적이고 의욕이 넘친다. 부모가 원하는 모델이 대체 어떤 것이기에 그러한 열정이 가능할까.
실상 이와 같이 의욕이 넘치는 '공격적 교육'은 이미 1960년대부터 시작된다. 늘 먹을 것을 걱정하는 상황이니 국가는 부를 위한 성장제일주의 정책에 몰두하게 된다. 교육은 나라살림에 필요한 인재들을 길러내는 일을 가장 큰 목표로 삼았다. 그렇게 배운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4학년 때부터' 공부하도록 잡아야 하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고 나라에 충성하는 길이다. 이런 교육관을 사람들은 '전제적 교육관'이라고 부른다. 국가가 제시하는 모델에 적합한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 국가의 이념이고 교육의 사명이므로 부모로서는 자녀가 국가 이념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다.
#3. 따로 노는 개인
그런데 현대의 기술문명의 발달과 정보공유의 기회가 늘어나면서 근대 산업사회는 정치적 권위주의를 해체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확장시켰다. 더 많은 자유와 권리를 획득한 개인은 왜 국가가 제시하는 이념이나 모델을 따라야 하는지 따져 묻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되면서 전통사회에 깊이 박혀있던 수많은 불평등은 줄어들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나'가 가장 소중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유아독존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의 기술사회는 또 다른 불평등을 가져왔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확장은 더 이상 공동체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혼자서도 충분히 지낼만한 여건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러한 불평등은 사회의 구성원들을 '원자'처럼 각자 따로 노는 개별자로 만들어 버렸고 공동체에는 새로운 위협이 되고 있다. 개인의 독립성이 높을수록, 그 개인은 공동체가 필요없기 때문이다. 혼자서도 잘 놀 수 있으니 부모의 밥상머리 교육은 아이에게는 불필요한 간섭이 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공동체 사회가 여전히 유효하다면 개인으로서 유아독존의 소중함을 함께 나눌 새로운 공동체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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