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민수 (사)KUDA실용댄스협회장 |
필자는 얼마 전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라는 책을 읽은 바 있다.
기원전 396년, 로마는 마침내 에트루리아에서도 유력한 도시였던 베이를 공략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10년 동안의 고군분투 속에 거둔 승리인 만큼 그 기쁨과 보람이 컸던 것도 잠시, 결국 정과부의 현상대로 국내의 계급투쟁이 재기 되고 말았다.
로마의 좋지 않은 상례는 타국과의 전쟁에서는 거국일치 체제가 되어 전쟁에서의 승리를 거두지만, 전투가 끝나기 무섭게 귀족파와 평민파로 나뉘어 싸움을 벌이는 것이었다.
귀족파와 평민파가 서로 세력다툼을 하고 있는 와중에 기원전 390년 여름, 아펜니노 산맥을 넘은 켈트족은 진군하는 길목에 있는 에트루리아 도시들을 공략하면서 남하하기 시작했다.
켈트족전사의 용맹성은 이미 로마인에게도 전해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더더욱 이 사건은 로마인들을 공황상태에 빠지게 했다.
방어전의 지휘권을 맡은 포필리오스레나는 “우리가 지금 상대하고 있는 적이 라틴족이나 사비니족처럼 전투가 끝난 뒤에도 우리 동맹국이 될 수 있는 민족이라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번적은 흉포한 짐승이다.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 라는 말로 로마인의 사기를 북돋우며 맹렬히 싸웠지만 기원전 390년 7월18일, 로마군은 테베레강 상류에서 맞이한 적에게 맥없이 패하고 말았다.
로마 패잔병은 기력을 잃고 흩어졌으며, 로마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 군대 군대있는 성문조차 닫혀 있지 않을 정도로 무방비상태가 된 로마에 켈트족의 침범이 시작되고 말았다
그 후 일곱 달 간 야만족의 만행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저항력 없는 로마에서 켈트족은 로마인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고 폭행하고 약탈하며 노예로 삼았고, 신전도, 원로원 의사당도, 저택도, 시장도 모조리 파괴하고 불태웠다.
힘이 없는 로마는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으며, 이 사건은 로마건국이후 최초의 굴욕이 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로마인은 결국 300㎏의 금괴와 켈트족의 철수를 맞바꾸자는 협상을 제시했고 그 협상을 수락한 켈트족은 7개월여의 로마점령을 풀고 로마를 철수하게 되었다.
그 후 다시 로마가 일어나기 까지 많은 기간이 필요했다.
야만족 앞에 어이없이 붕괴한 로마에 등을 돌린 인근부족과 라틴동맹의 공중분해로 야기된 어제의 동맹국이 오늘의 적으로 돌변하는 사태가 겹쳐 또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차후 어떻게 로마가 다른 폴리스보다 강대해질 수 있었느냐하는 의문에, 로마의 역사를 쓴 그리스의 폴리비오스는 오히려 그 당시 켈트족 침입을 로마가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로 기록하고 있다.
밑바닥으로 떨어 졌기 때문에 오히려 그 탄력으로 다시 올라 올 수 있지만 밑바닥에 떨어진 채 그대로 올라오지 못하고 끝나버리는 민족도 적지 않다.
한때의 국론분열과 개개인의 이기심으로 야기된 다른 나라의 아픈 붕괴와 끈질긴 재기의 역사…. 아픈 과거와 현실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가 함께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았음 하는 바람을 안고 반짝이는 6월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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