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덕재 시인ㆍ대전시인터넷방송 PD |
주인공은 헌책방에서 찾아낸 그림책을 보면서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거나 세월을 간직한 오래된 가게를 보며 상념에 잠긴다. 여러 삽화 중에서 재개발을 앞둔 마을의 골목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가이드북을 만들어 골목을 널리 알리는 캠페인을 벌이자”는 주민의 말에 “이런 골목길은 가이드북에 의지하지 말고 그냥 걷는 게 재미있다”는 대응의 논리는 산책의 의미를 배가시키는데 충분하다. 주인공은 걷다 보면 자기 스스로 재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목적없이 자기 마음대로 느긋하게 걸으며 오는 기쁨이 산책의 매력이라는 것이다.
8편의 짧은 에피소드를 소재로 하는 '우연한 산보'는 옛 풍경에 대한 그리움과 기억을 재생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플롯 역시 산책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는 점도 눈여겨 볼만 하다. 저자는 작품을 구상하며 세 가지 규칙을 만들었다. 첫째, 조사하지 않는다. 둘째, 옆길로 샌다. 셋째,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얼핏보면 무원칙한 규칙으로 보이나, 그는 의미없이 걷는 즐거움을 느끼기 위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지도를 본다해도 재미있어 보이는 방향의 샛길로샌다는 규칙은 산책의 묘미를 증대시키는 방식이 아닐까 싶다.
지난해 한 포털사이트에 연재된 쥬드 프라이데이의 웹툰 '길에서 만나다'도 '우연한 산보'의 주제 전달과 맞닿아 있다.
서울 남산타워에서 만난 은희수와 미키의 로드무비라는 설명처럼 웹툰에서는 골목길 산책의 소소한 발견을 놓치지 않고 있다. 주인공은 남산타워에서 시내를 굽어보고 서울의 다양한 골목에 대한 단상을 펼쳐 놓는다. '행길은 시간을 절약하지만 골목길은 시간을 멈출 수 있다'라는 그림해설에서 산책의 묘미를 찾을 수 있다.
일본과 서울 못지않게 대전의 원도심에도 골목이 주는 즐거움이 가득하다. 옛 충남도청에서 대전역까지 좌우로 펼쳐진 골목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젊음의 기운이 풋풋하게 느껴지는 으능정이 거리, 대흥동의 갤러리와 소극장 골목들, 미로처럼 얽힌 정동 인쇄골목을 걷고 있으면 카세트 테이프를 뒤로 돌리듯 시간은 과거로 돌아간다.
필자는 6월이 되면 1987년 옛 충남도청 앞에서 대전역 인근까지 가득 메웠던 시위인파가 떠오른다. 6월 10일 전후였던 것 같다. 당시 저녁무렵 도청 꼭대기층 사무실 창문은 모두 열려있었다.
'님을 위한 행진곡'등 민중 가요를 부르는 인파속으로 한 슈퍼마켓 주인은 아이스크림을 연거푸 던져줬다. 잠시 후 불 꺼진 도청 사무실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최루탄이 날아왔다. 사람들은 눈물 콧물을 흘리며 이 골목 저 골목으로 피신했다. 지금도 중부경찰서 골목길을 지날 때면 그 때 그 시절의 기억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충남도청이 떠나며 원도심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사업이 펼쳐지고 있다. 원도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거리 곳곳에서 문화예술행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원도심 골목을 돌아다니는 프로그램이 나온 것도 반가운 일이다.
'우연한 산보'의 쿠스미 마사유키는 산책의 비법을 천천히 걷는 것이라고 말했다. 목적만을 생각한 채 급하게 걸을 때 보지 못한 사실이 더 많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때문에 산책을 '우아한 헛걸음'이라고 정의를 내린다. '우연한 산보'의 주인공이 도시를 바라보며 “우리는 50년 뒤에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라고 남긴 독백은 오래된 골목을 기억하는 우리 모두가 함께 공유해야 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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