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병로 한밭대 건설환경공학과 교수 |
당시 대학에는 5000명에 달하는 야간부 학생들이 있었는데, 주변에 식당 하나 없어 저녁 식사를 못하고 등교하는 것이 늘 안타까웠다. 그래서 김밥장사를 하면 친구도 돕고 학생도 돕는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 수익보다 세상을 배우고 봉사활동 하자며 의기투합을 했지만, 친구 3명은 교직에, 다른 한 명은 꼿꼿장수로 군생활을 한 고지식한 성격이라서 결정은 쉽지 않았다.
마침 아내들이 돕겠다고 자청하면서 길거리 김밥장사가 시작됐다. 아내들이 매일 아침부터 분주히 김밥을 지어 오후 6시가 되면 4가족 모두 대학 후문 도로변에 가지고 와서 노점상을 한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김밥은 잘 안 팔렸다. 시중 가격의 절반인데도 매일 3분의1은 남았고 남은 김밥은 필자의 수강생들에게 나눠주거나 강의를 마치고 밤늦게 귀가하는 학생들에게 공짜로 제공했다. 현직교수가 제자들을 상대로 길거리에서 김밥을 파는 것이 너무도 쑥스러워서 초창기에는 '김밥사요'하는 목소리는 잘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제자가 반갑게 교수님을 외치며 김밥 한 줄 더 팔아주겠다고 할 때, 학과 교수님이 차를 타고 지나가시며 손을 흔들어 줄 때 얼굴이 붉어지지만, 힘을 얻기도 했다. 또 주말 몇 푼 안 되는 이익금으로 요양병원, 양로원 위문활동을 할 때나 주말 폐지를 줍는 할머니의 손수레를 밀어 드릴 때 그들의 환한 미소가 창피함과 피곤함을 잊게 해줬다.
일이 끝나고 함께 모여 뒷정리를 하며 마시는 맥주 한잔에 우리의 우정은 더욱 깊어졌다. 우정이 깊어가며 매출도 늘었고 주말에 서해안 바닷가 여행을 하는 여유도 생겼다. 어느새 우리는 익숙한 장사꾼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10월께 군 출신 친구가 예전엔 상상도 못할 외판원으로 취직하면서 김밥장사는 문을 닫았다.
10년이 훨씬 넘은 지금까지도 매월 만나는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들로 남았고, 언제나 서로 격려해주는 후원자가 되었다. 김밥장사 이후 삶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쑥스러움이라 할까 권위의식라 할까 사람들 속에 깊이 빠져들지 못하는 벽이 있었는데, 이것들을 버리니 많은 것이 새롭게 보였다.
사람만 빼고는 많이 버릴수록 더 많은 새로운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학 때부터 휴머니스트클럽 활동을 하면서 늘 사람이 우선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돌이켜보니 나를 필요한 사람보다 내가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김밥장사가 권위를 깨는 것인지,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것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지만, 주변의 격려 한마디, 지지의 손짓 하나에 용기를 얻고 행복을 얻는 체험을 했다. 이후 나와 다른 처지에 있는 남의 의견을 듣고 함께 고민하는 버릇이 생겼다. 행복은 나의 즐거움을 나누거나, 남의 고충을 함께 나누며, 외부에서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서 짓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또 평소 해보고 싶었던 리더십 학원을 다니며 용기를 키웠고 동문회를 결성, 3000여 동문의 회장이 되었다.
최근엔 사회의 갈등 해결에 관한 연구를 하고자 대학원 석사과정을 다니고 있다. 예전엔 주변 눈치 보기로 대학입학이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요즘 새로운 학문에 심취해 즐겁다.
연습이 없는 인생살이, 하고 싶을 때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 늘 용기를 내어 도전해 본다. 그때마다 주변의 따뜻한 격려 한마디에 큰 힘을 얻는다.
김밥장사를 통해 스스로 둘러싼 벽을 허물고 난 뒤, 언제나 내일처럼 나를 고민해 주는 친구를 얻었고, 혼자 피식 웃을 수 있는 추억을 쌓았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용기와 주변 사람에 대한 배려심을 얻었다. 반백의 나이를 훌쩍 넘어 이제서야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희미한 답을 찾은 것 같다. 5월이면 생각나는 김밥장사의 추억은 늘 나를 행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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