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난순 교열부장 |
가족은 어떤 의미일까. 왜 사람은 가족에 애착을 갖게 될까, 왜 가족에 대해 고통스러워할까. 전통적으로 유교적 가족주의가 견고하게 자리잡은 우리사회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은 진리로 통한다. 가족은 신성하고 절대적인 힘을 발휘한다. 나라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국가 권력은 가족에 대한 원초적인 관념을 자극해 '나라가 살아야 가족도 산다'며 국민들을 동원해 희생을 요구한다. IMF때 국민은 집집마다 장롱 속의 금을 모아서 외채를 갚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가족은 튼튼한 울타리고 국가는 가족공동체로 받아들이는 사회구조에서 기인되는 현상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생각이 한낱 환상임에도 불구하고 '가족 로망스'의 족쇄에 묶여있는 상황을 파시즘 체제라고 규정한다. 희생양으로서의 가족, 가해자로서의 가족. 인간은 가족에 대한 집착속에 살면서도 서로간 기대 충족이 되지 않으면 갈등과 폭력의 희생자 혹은 가해자가 된다는 것이다. 루이 알튀세르는 가족을 '가장 끔찍한 이데올로기의 국가기구'라고 정의했다. 남편, 아내, 자식의 관계는 사랑과 결합한 폭력과 그것에 대항하는 기만과 배반으로 엮어진 오이디푸스적 구조에 의해 특징지어진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을 예로 들어보자. 스탈린은 '자애로운 인민의 아버지'와 대조되는 난폭한 권력자였다. 아내를 자살로 몰고가고 아들을 학대한 잔인한 아버지였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죄목으로 동생의 부인들을 비롯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을 처형했다.
그래서일까. 겉잡을 수 없는 사회·경제적 양극화 속에 우리의 전통적 가족관계가 위기에 직면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빈곤층의 경제위기는 가족의 희생으로 직결되고 부유층의 치부는 가족동원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그 여파로 탈가족화 현상이 대두되는 가운데 독신으로 살거나 이혼, 저출산의 경향이 늘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항상 가족들로부터 떠날 수 있는 유목자이길 원했고 김빠진 맥주같은 이 도시를 혐오했는데 말이다. 결코 이 비정한 도시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가족이야말로 나의 안식처임을 깨달았다는 거다. 근 스무날 땅속 나락으로 한없이 추락하는 듯한 몸의 고통은 견디기 힘들었다. 망망대해 천애고아가 된 듯한 깊은 밤의 두통과 기침, 불면은 지독한 외로움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가족의 온기를 그리워하는 나를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하늘 아래 나 혼자 뚝 떨어진 존재라고 생각했다. 나 자신만 생각하고 나만의 삶의 즐거움을 추구했다. 애써 나의 근원을 외면하고 싶었다. 끝없는 갈등과 미움으로 들끓는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늘 저 산 너머 무지개 뜬 낙원을 꿈꾸며 살았다. “가족이란 누가 보지만 않는다면 내다버리고 싶은 존재”라고 기타노 다케시도 말하지 않았나. 하지만 '힘들 땐 가족이 최고'라는 뻔하다고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됐다.
영화 '고령화 가족'에는 가족끼리 밥먹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송해성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나를 먹여주고 위로해주는 가족이 있다면 절망하지 않고 나아갈 힘이 생긴다”고 했다. 이번 주말에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에 고단해 하는 친구를 불러야겠다. 두부, 호박, 매콤한 청양고추 숭덩숭덩 썰어넣은 뜨끈한 된장찌개 같이 퍼먹으면서 등을 토닥여줄 참이다. 가정의 달 5월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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