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이 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
지금 우리 사회는 고졸 10명 중 8명이 대학에 진학한다고 한다. 그것도 '인(in) 서울' 대학을 향해서. 나머지 2명만이 대학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하는 셈이다. 그런데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소수와 '인(in) 서울'에 발을 디디지 못한 다수 모두는 다수가 만들어 놓은 학력ㆍ학벌주의로부터 끊임없이 홀대와 왕따를 당한다. 비주류라는 이유만으로 '이상한 사람'이 되고, 무슨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실패한 사람'이 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심지어 '인(in) 서울' 입성에 성공한 소수 또한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에 앞만 보고 달려야”만 했다던 한 대학생의 고백처럼 학력ㆍ학벌주의에 순종할 것을 강요당한 꼴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주류 중 주류로 편입되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다수의 횡포 대열에 합류하게 되고, 그 대열의 불안한 줄타기는 계속된다.
<김예슬 선언>으로 불린 고대 학생의 자퇴 선언서를 기억할 것이다. 그것은 다수의 횡포, 그 불안한 줄타기에서 내려와 자기 방식대로 삶을 꾸려 나가려는 당당한 숨소리였다. “그리하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시들어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이제 나에게는 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 더 필요하다. 나는 길을 잃을 것이고 도전에 부딪힐 것이고 상처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이기에 지금 바로 살기 위해 나는 탈주하고 저항하련다.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내련다.”
대부분의 사람은 다수 의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집단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지만, 너무 쉽게 너무 자주 다수에 속아 넘어간다. 다수의 의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르기도 하며, 다수의 의견이기 때문에 '고민 없이' 받아들이기도 한다. 다수의 의견이기 때문에 '이유 없이' 거부하기도 한다. 어쩔 수 없이 다수를 따라야 하는 상황이 거듭될수록 집단과의 갈등은 더욱 심각해 질 것이고, 고민 없이 다수를 받아들이는 상황이 거듭될수록 주체는 바로 설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유 없이 다수를 거부하는 상황이 거듭될수록 집단으로부터 소외당할 것이다.
이러한 갈등과 소외로부터 벗어나 주체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길은 다수의 횡포로부터 탈주하고 저항하여 “생각한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내겠다”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는 자유뿐이다.
오늘의 다수가 내일의 소수가 될 수 있고, 오늘의 소수가 내일의 다수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다수에 편입되느냐 소수에 편입되느냐가 아니다. 8명에 속하든 2명에 속하든 각자의 선택이 과연 얼마나 자율적인가에 달렸다. 과연 얼마나 합리적인가에 달렸다. 그렇게 되었을 때, 건강한 다수는 수적 우세로 소수를 지배하지 않으며, 건강한 소수는 수적 열세로 다수에 가려 침묵하거나 희생당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건강한 다수와 건강한 소수가 함께 어우러져 사는 세상이어야 한다. 다수라고 해서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아니며 소수라고 해서 절대적으로 그른 것도 아니다. '다수는 왜?', '소수는 왜?'의 물음을 통해 다수가 소수에게 귀 기울이고 소수가 다수에게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다수가 바라보는 눈과 소수가 바라보는 눈을 한곳으로 모을 때, 내일 당장에라도 무슨 일을 해 낼 수 있는 슈퍼 울트라 파워 에너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도 한 대학생의 선언처럼 “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 더 필요할 때다. 함께 사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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