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신호 대전시교육감 |
장자의 '전자방(田子方)'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안연이 공자에게 “선생님께서 걸으시면 저도 걷고, 선생님께서 빨리 걸으시면 저도 빨리 걷고, 선생님께서 뛰시면 저도 뜁니다(夫子步亦步, 夫子趨亦趨, 夫子馳亦馳)”라고 말했다. 여기서 유래한 고사성어가 바로 '역보역추(亦步亦趨)'다. 제자가 스승의 발자국을 따른다는 것으로 남의 뒤를 추종하거나 그대로 흉내 내어 따라한다는 의미다.
예전에는 경험과 지식이 많은 사람이 자신의 지식을 기초로 부족한 사람들을 이끌어 주었는데 그가 바로 스승이었다. 근대산업사회의 학교 스승도 마찬가지로 최고의 지식을 제자들에게 줄 수 있는 절대적 가르침의 존재였다. 그러나 21세기 지식정보화사회는 지식과 정보가 학교가 아닌 곳에서도 넘쳐나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요즈음은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이 예전보다 약화되었다. 스승에 대해 모든 것(everything)에 고마움을 느끼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고마운 스승과 제자의 진정한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가 스승 앤 설리번과 제자 헬렌 켈러일 것이다. 헬렌 켈러는 “만약 내가 눈을 떠서 3일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 가장 먼저 나를 가르쳐 준 설리번 선생님을 찾아가, 그 분의 얼굴을 바라보겠습니다”라고 했다. 설리번 스승이 단순한 지식 전달의 교사였다면 이런 감동의 코멘트를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설리번은 제자인 헬렌을 일반 아동과 똑같은 인격체로 보았으며,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확고한 믿음과 사랑을 갖고 있었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면, 다른 사람이 볼 수 없었던 것을 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헬렌 켈러가 말하는 것처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고 단지 가슴으로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스승은 학생들에게 그저 지적 세계만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세계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
예기(禮記)의 학기(學記)편에 교학상장(敎學相長)의 내용이 나온다. “좋은 안주가 있다고 하더라도 먹어 보아야만 그 맛을 알 수 있다. 또한 지극한 진리가 있다고 해도 배우지 않으면 그것이 왜 좋은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배워 본 이후에 자기의 부족함을 알 수 있으며, 가르친 후에야 비로소 어려움을 알게 된다. 그러기에 가르치고 배우면서 더불어 성장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스승의 가르침과 제자의 배움을 통해 서로 탁마(琢磨)를 해야 하는 것이 진정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 할 수 있다. 교학상장의 결실은 모든 것(everything)이 고마운 스승과 제자 사이가 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학교 다닐 때 스승의 칭찬 한 마디가 자신의 인생 항로를 바꾸어 놓았다는 사람이 많다. 스승은 제자의 옥석을 가려내거나 걸러내는 것보다 제자의 돌 안에 들어 있는 옥을 발견하고 빛을 낼 수 있도록 사랑으로 다듬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단순한 지식 전달자가 아닌 사랑과 감동까지도 덧입혀 줄 수 있는 선생님을 우리 시대는 원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나에게도 퍼거슨과 같이 모든 것이 고마운 스승님들이 계신다. 문득 그 분들에 대한 고마움을 오월의 하늘에 담아 본다.
“모든 것이 고맙습니다. 스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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