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양유업에 대한 항의시위 모습.[연합뉴스 제공] |
그럼에도 '갑을관계'의 뜻은 영 딴판으로 사용되고 있다. 계약서상 계약 당사자를 단순히 '갑'과 '을'로 지칭하지만, 관용적으로는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은 쪽을 갑, 낮은 쪽을 을이라 부른다. 양자 관계에서 상대방의 생사여탈권을 쥔 강자가 갑이라면, 살기 위해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약자는 을이다. 서류상에만 갑을관계일 뿐, 실질적으로는 상하관계, 주종관계인 것이다.
이런 갑을관계는 사회 전반에 널려 있다. 통상 계약관계에선 발주처나 발주인이 갑이고 수주업체나 수주업자는 을이다. 고용관계에선 고용인과 피고용인이 갑을관계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갑이 갑의 위치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을이 될 수도 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삼성전자만 해도 사내 하청업체에게는 갑의 신분이지만 부품을 납품하는 미국 애플사에는 을의 입장이다. 현실에선 갑과 을 외에도 '병'이 존재한다.
대기업을 기준으로 1차 협력업체가 을이라면, 2차, 3차 협력업체는 병이다. 을은 직접 하청을 주는 병과 또 다른 갑을관계가 된다. 이렇다보니 병은 대기업보다 1차 협력업체를 더 무서워 한다. 갑을관계가 먹이사슬처럼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결국 '갑을병'은 힘이 강한 순서로 연결된다.
최근 우월적 지위에 있는 남양유업 직원이 대리점주에게 폭언하고 부당행위를 강요하는 녹음파일이 공개돼 사회적 파장이 일면서 감추어졌던 고질적인 갑을문화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이밖에 화장품회사가 수백만원어치의 화장품을 대리점에 떠넘기고 당일 입금을 요구하거나 대형 제빵체인이 안 팔린 빵을 반품받지 않는 사례, 이동통신사들이 대리점을 경유해 일선 판매점을 대상으로 휴대전화 외에 인터넷, 집전화 계약 유치 목표를 부과하고 이를 채우지 못하면 페널티를 물리는 것도 갑의 횡포 사례다.
갑을관계의 폐해가 남양유업 사태를 통해 불거지자 인터넷과 SNS에선 경제민주화가 다시 화두가 되고 있다. '갑'의 약자 입장에 있던 '을'들이 인터넷 등을 중심으로 뭉쳐 갑을문화 타개를 위한 반란(?)도 꾀하고 있다. 기업들은 최근 대기업 임원의 항공사 승무원 폭행에 이어 이번 사태발생으로 좌불안석이다. 정부의 경제민주화 추진에 빌미를 제공하는 꼴이 됐다.
갑으로부터의 수모에도 불구하고 을이 갑을관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생계수단이고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건설업자의 원주 별장 성접대 로비사건처럼 이익을 취하기 위해 갑에게 로비를 마다하지 않는 '을'의 자세도 바뀌어야 한다. 서로를 존중하고 상생하는 갑을문화가 형성돼야 한다.
김덕기ㆍ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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