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지호 고암미술문화재단 대표 |
일랑 이종상 화백께 들은 일화를 소개하면, 언젠가 부친의 친구인 고암이 삽에 아궁이에 불을 지핀 뒤 남은 재를 나뭇가지에 묻혀 쥐를 극사실적으로 그려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을 정도였다. 재미로 그린 쥐가 얼마나 실감 났던지, 다들 진짜 쥐인 줄 알고 당황해했다고 알려졌다.
타고난 화가였던 것이다.
서화가가 되고 싶었던 고암은 1923년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서울에 당도하자마자 당시 '묵죽(墨竹)의 대가', 해강 김규진을 찾아갔다. 고암은 특유의 끈질긴 목표의식이 발동하며 해강이 자신을 문하생으로 받아들인다는 승낙을 받을 때까지 찾아갔다. 결국, 고암은 해강에게 서예와 문인화 등을 배웠고 평생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이후 고암은 또 한 번의 모험을 시도한다. 1935년 일본 유학길에 오른 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가와바타와 학교와 혼고회화연구소를 거쳐 일본 '남화의 대가' 마츠바야시게이게츠(松林桂月)를 찾아가 끈질긴 구애 끝에 사사했다. 해강 김규진과 마츠바야시게이게츠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은 당대에 높은 명성의 예술가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해강 김규진이 일제 식민지시대의 작가였다면 마츠바야시게이게츠는 제국주의 시대의 작가였다. 사상적으로 자유로웠던 고암을 생각하면 이들을 스승으로 모신 것을 다소 이율배반적인 태도로 볼 수도 있다.
1945년 무렵,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돌아온 고암은 장우성, 배렴, 김영기 등과 함께 일본미술의 잔재를 청산하고 우리 민족 고유의 한국화를 강조하는 단구미술원을 조직했다. 1948년에는 홍익대 교수로도 활동하는 한편 개인 교습소인 고암화숙을 개설해 운영했다. 1958년엔 50세가 훨씬 넘은 나이에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새로운 예술을 향한 비행을 시작한 것이다.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고암은 당장 하루 생계비를 걱정하는 부인에게 오히려 파리의 건물들을 가리키며 그림을 걸 수 있는 공간이 이렇게 많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는 동문서답을 했다고 전해진다.
바로 이것이 대가로서의 작업본능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된다.
이같은 그의 당당한 배포가 결국 파리에서 그만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성공적으로 구축하도록 했고, 1961년 당시 최고의 명성을 떨치고 있었던 파게티 갤러리(Galerie Paul Facchetti)로부터 전시제안과 함께 전속작가계약이라는 성과를 얻었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스웨덴, 일본, 대만, 미국 등의 공공미술관들이 고암의 작품을 소장하고 초대전을 개최하면서 고암은 국제적인 작가로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고암에게는 파리에서 화가로서의 성과 외에도 간과할 수 없는 교육자로서의 성과도 있다. 바로 서울의 고암화숙을 파리로 옮겨 한국미술의 씨를 뿌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세르니쉬 파리 시립동양미술관 내에 당시 이 미술관의 관장이면서 저명한 동양미술사학자 엘리세프와 함께 파리동양미술학교(Academie de Peinture Orientale de Paris)를 설립했다. 아루퉁과 슐라쥬, 자우끼, 장대찬, 후지다, 이희승 등 세계적인 화가와 학자들의 발기와 후원으로 이뤄졌다. 동양미술의 기운 생동과 고암의 화풍을 고스란히 유럽에 전파하는 유일한 동양미술교육기관이었다.
엘리세프 관장은 파리동양미술학교 안내 책자에 '동양의 섬세하고 우아한 여러 가지 화풍들을 눈으로 보고 책으로 연구했지만, 직접 붓과 먹을 가지고 체험해 본다는 것은 아마 우리에게 크나큰 기회이며 동양예술에 대하여 더욱 이해하기 쉬운 첩경이 될 것이다'라고 적었다.
고암은 1989년 세상을 떠났지만, 다행히 2007년 대전이응노미술관이 개관하면서 파리에 남긴 고암의 정신은 한국에서도 이어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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