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 인간이 가지는 위치성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위치를 가지고 산다. 위치를 가진다는 것은 보고 느끼고 사고하는데 한계를 지닌다는 말이다. 어떤 건물 앞에 위치를 지니고 서 있는 사람은 건물 앞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뒤편의 사람은 뒤편만을 본다.
그러나 인간이 성숙하면 자기 위치에서 본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점차 알게 된다. 자기 위치의 한계를 앎과 동시에 타인들의 위치가 있고, 그 위치에서 보는 것은 내가 보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가게 된다.
이렇게 자기가 가진 어떤 위치에서 벗어나 점차 더 많은 위치의 관점과 입장을 고려하고 종합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숙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 가진 과제다.
승무원을 폭행한 대기업 임원에게서 그리고 베이커리 기업 회장에게서 자기 위치만을 고집하는 다섯 살 어린아이를 본다. 자기의 위치에서 보고 느끼고 욕구하는 것만이 전부이고 절대라고 고집부리며 울고불고 바닥에 뒹굴고 마는 다섯 살 아이가 성인의 몸을 빌려 폭행하고 있는 모습이다.
어릴 때는 그렇게 떼를 쓰고 고집을 부리면 조금 힘들어도 사람들이 참아 주지만 어른 몸을 입으면 통하지 않게 되는 법이다. 어릴 때 통했던 것이 지금 통하지 않게 되었다면 성숙한 사람의 할 일은 자기를 성찰하는 일이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고 용서를 구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이 참 성숙과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그런데 많이 실망스럽다. 폭행 사실을 발설한 사람을 찾아 나서는 항공사, 수많은 사람의 생계가 달려 있는 베이커리 기업을 아주 쉽게 폐업해 버리는 회장에게서 다시 자기 위치에 빠져서 떼쓰고 바닥에서 뒹구는 다섯 살 아이, 나아가 다섯 살 아이밖에 안된 우리 사회의 나이를 보게 된다. “나는 다섯 살이 누리는 보모가 주는 달콤함을 잊을 수 없다!”고 외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다섯 살 아이의 모습이 폭력을 휘두른 대기업 임원, 베이커리 회장 등, 그들만의 모습일까?
자기 위치를 넘어서 더 큰 그림을 보고 다른 위치에서도 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 위치에서 누리는 달콤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위치 달콤함'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내 기준과 입장대로 하고 나서 이겼고, 옳고, 잘했고, 성공했다는 심리적 만족감과 이익이란 상금을 얻었다는 착각이 바로 '위치 달콤함'이다.
그러나 '위치 달콤함'이 지속될 수는 없다. '위치 달콤함'에 대한 집착은 자꾸만 사건을 일으킨다. 폭력을 휘두른 대기업 임원이나 베이커리 회장처럼 말이다. 약자에게 폭력을 휘두른 건 잠시 자기의 '위치 달콤함'을 만족시켜 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언젠가는 '위치 씁쓸함'으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누구나 '위치 달콤함'을 누려보고 싶고 그 사탕을 얻으려고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그럴 때, 그 달콤함이 결국 자신과 같이 살아가는 사회를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성찰함으로써 자기 위치를 넘어 더 큰 사회적 그림에 일치시켜가는 성숙이 필요하다.
나 자신에게서도 그리고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에게서 '위치 달콤함'의 사탕을 탐닉하는 다섯 살이 아니라 더 많은 위치를 고려하고 배려하며 서로 존중하는 성숙한 인격의 성인(成人)들과 사회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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