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병원 국립대전현충원장 |
사람의 나이로 따지면 환갑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추모행사는 굳건히 이어지고 있다. 매년 열리는 이 행사를 보면 한민족의 살아 숨쉬는 혼을 느낄 수 있다.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애국지사의 혼, 끝없이 이어지는 추모의 혼, 매년 5월이면 대한의 위대한 혼들이 이곳에 모여 무궁화를 피우고 있다.
이 추모행사는 한국 근우회에서 주최하는데 근우회는 여성운동단체로 1927년 5월, 여성 항일구국운동과 여성 지위향상을 목표로 한국 여성의 대동단결을 꾀하고 모든 운동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창립됐다.
조신성 선생은 근우회 평양지회를 설립했고 평생 여성들의 경제의식을 높이기 위해 매진했으며 여성의 구직을 돕는 등 현실적인 여성운동을 전개했다.
1934년 '신가정'의 한 기자가 조신성 선생에게 “직접 운동을 실행하시는 동안에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일을 하셨습니까”라고 질문했다.
이에 조 선생은 “가슴에다 육혈포, 탄환, 다이너마이트를 품고 시시로 변장을 해가며 깊은 산 속을 며칠씩 헤매고 생식을 해가면서 고생을 하고, 주막에서 순검에게 잡혀서는 격투하거나, 오도 가도 못하고 끼니를 굶어가며 산속에서 며칠씩 숨어 있었다”고 대답했다.
강철부인라 불렸던 선생은 진명여학교 시절 교장으로 취임해 일본어를 가르쳤다. 일본말을 배워야 그 나라 문명을 빼앗아 원수를 갚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날마다 저녁식사가 끝나면 바구니에 돌을 주워 담아 머리에 이고 와 학교 담장을 손수 쌓으며 학교 곳곳을 가꾼 모범적인 교육자였다.
조신성 선생의 인생 초기는 고단했다.
9세에 부모를 잃었고, 16살에 결혼하였지만 22살에 남편과 사별하게 된다. 이후 기독교에 입문하게 되고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 깊이 인식하게 됐으며 민족과 여성의 문제를 자각하게 된다. 그 후 한국 최초 조선부인회를 조직하고, 34살에 일본 유학을 마치고 민족교육에 힘쓰게 된다. 그 후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1955년 5월 5일 부산에서 80세에 운명하는데 1958년 2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국무회의에서 조신성 선생을 기리기 위해 기일인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제정했다. 이후 '어머니날'이 '어버이날'로 바뀌어 내려오게 됐다. 근우회는 부산에 안장돼 있던 조신성 선생의 시신을 1991년에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하고 매년 추모제를 지낸다.
여성들을 위한 교육이 거의 없었던 일제 강점기에, 폐교 위기에 처한 학교를 억척스러움으로 가꾸어 100여 명까지 확장시켰던 위대한 여성교육자. 수많은 여성들의 의식을 일깨우고 여성의 경제적 지위를 스스로 드높인 진정한 여성운동가. 오직 국가ㆍ민족을 위해 친척 하나, 자손 하나 없이 구국의 제단에 혼을 불살랐던 맹렬한 여성독립운동가. 60여년의 세월이 흘러도 추모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는 추모의 대상으로 우리들의 가슴에 매년 봄꽃처럼 새롭게 피어나고 있다.
지금 현충원의 야생화공원에는 눈이 부실 만큼 유채꽃이 만발하다. 눈이 부신 이유는 수십만 송이의 유채꽃이 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십 만 송이도 한 송이 한 송이가 있어야 가능하다.
현충원에는 10만 여 위의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계신다. 이렇게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이 계시기에 지금의 밝은 대한민국이 있다.
가정의 달인 5월, 어버이날의 근원이 된 조신성 선생을 기리며 가족과 함께 국립대전현충원에 잠들어 계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제단에 국화 한 송이를 바쳐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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